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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그리스도의 삼중직 박철동 201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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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그리스도의 삼중직

 

칼빈의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1)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대한 역사적 개관 (2) 칼빈의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대한 개관 (3) 그리스도의 예언자직 (4) 그리스도의 왕직 (4)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1.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대한 역사적 개관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예수는 왕과 제사장의 이중직을 대표한다고 인식되었고 2세기로부터 이러한 사상은 추적되어 진다. 유세비우스는 선지자직을 포함한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말하였으나 그리스도의 이중직에 대한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유세비우스의 견해를 따라 삼중직을 말하였지만 그에게는 이러한 관점은 단순한 구조적인 구분에 불과하였다. 종교 개혁 초기에 복음적인 교리들도 이중직의 전통을 따랐다. 칼빈이 선지자직을 포함한 삼중직의 기능을 그리스도의 사역의 교리로 연결시킨 이후에 개혁주의 신학 뿐만 아니라 루터주의 신학도 이러한 견해를 일반적으로 수용하였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웨스트 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 수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칼빈 이후에 개신교 정통주의는 기존의 관점에 추가하여 삼중직에 따라 역사적 발전 안에서 구원의 사역을 분석하면서 그리스도가 처음에는 선지자로 그 다음은 제사장 마침내는 왕으로 사역했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비하 상태에서의 왕직과 승귀 상태에서의 선지자직을 제거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콕세이우스가 이러한 관점을 보다 성경적인 관점으로 전환 시켰고 로마 카톨릭 요리문답 또한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의 개혁교의학들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비하와 승귀의 상태에서 각각 삼중직으로 나누어 제시하고 있다.

 

2. 칼빈의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대한 개관

칼빈은 그리스도가 성부에 의해 보내신 목적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푼 것을 알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그 안에서 세 가지, 즉 예언적 사명, 왕직, 제사장직을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믿음이 구원의 확고한 근거를 그리스도에게서 찾으며, 따라서 그 안에서 안식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정해야 할 원칙이 있는데, 이것은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임명하신 직책에 세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예언자와 왕과 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이름들을 알더라도 그 목적과 효험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아는 것이 무가치할 것이라고 말한다.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삼중직의 성격은 주로 현재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세 직분이 주는 의미와 효험에 맞추어져 있다. 다시 말하면 일부의 내용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도가 승귀된 상태에서의 현재 행하시는 삼중직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은 이러한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삼중직에 모두 포함 시키지 않았고 어떤 체계화도 시도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가 삼중직을 언급한 15장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주로 비하 상태에서 언급한 16-17장에서도 삼중직적 측면에서 관련 내용을 추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3. 그리스도의 예언자직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예언자들을 연달아 보내시며, 구원을 위해서 충분하고 유용한 교리도 알려 주셨지만, 경건자들의 마음에는 항상 메시야가 와야만 이해의 완전한 광명이 있으리라는 기대와 확신이 가득했었다. 진정한 종교를 깨달은 일이 없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까지 이 기대가 침투했었다는 것은 "메시야가‥‥‥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고 한 여인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4:25). 또 이것은 유대인들의 경솔한 억측이 아니라, 분명한 계시에서 배운 믿음이었다고 말한다.

예언자들의 공통된 임무는 교회가 기대를 잊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중보자가 오실 때까지 그 기대를 유지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구약의 예언자들의 실체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사명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먼저 그가 성령에게 기름부음을 받아 아버지의 은총을 전파하는 증인으로 임명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 방법으로 된 일이 아니다. 비슷한 직분을 가진 다른 교사들과 그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 그가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은 그 자신이 가르치는 직분을 다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의 몸 전체를 위해서 받으셔서 복음이 계속 전파되는 일에 성령의 권능이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전하신 완전한 가르침이 모든 예언을 종결시켰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만족하지 않고 밖에서 무엇을 가져다가 복음에 끼워 놓는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권위를 깎아내린다고 말한다.

하늘에서 우뢰같이 들려 온,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신 말씀은(17:5) 모든 다른 사람들을 초월한 각별한 특권으로 그를 높이신 것이다. 그 다음에 이 기름부음이 머리로부터 지체들에 확산되어, "너희 아들들이 예언하며 너희 딸들이 이상을 볼 것이며"라고 하는(2:28 의역) 요엘의 예언과 같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지혜로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며(고전 1:30), 다른 곳에서 "그의 안에 지식과 총명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다"고 말할 때에(2:3 의역), 그는 조금 다른 뜻을 생각한다. , 그리스도 이외에는 알 가치가 있는 것이 없으며,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믿음으로 깨달은 사람은 하늘 은혜의 무한한 전체를 깨달았다는 뜻이라고 한다. 복음의 단순성을 초월하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사도의 태도는 참으로 옳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예언자로서의 위엄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신 모든 말씀에 완전한 지혜의 모든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자의 사역에서의 예언자적 측면으로는 "예수"라는 이름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인 것처럼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가 되시도록 속죄주의 직책이 그에게 부과된 것이다. 이것은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라는(4:12) 베드로의 유명한 말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와 같다고 칼빈은 그 의미를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말씀같이 자신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갈 수 있음을 계시하신 선지자(예언자)이다.

 

4. 그리스도의 왕직

(1)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원성: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왕국은 본질상 영적 성격을 가졌다는 것을 칼빈은 강조한다. 왜냐하면 이 영적 성격에서 우리를 위한 그 효력과 혜택뿐 아니라, 그 모든 힘과 영원성이 추론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영원성에는 또 두 가지가 있다. 또는, 두 가지 방법으로 고찰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첫째는 교회 전체에 관한 것이며, 둘째는 각 개인 교인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구약성경의 많은 증언들은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살아서 자기의 지체들과 결합되리라고 선언한다. 칼빈은 여기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가 영원한 권능으로 무장하셨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런 보호 하에서 교회가 확실히 영속하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교회는 격렬한 동요로 끊임없이 고통하며 무섭고 비참한 폭풍들이 무수한 재난을 위협하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안전하다. 다윗은 원수들이 대담하게 하나님과 그 기름 부으신 자의 멍에를 벗어 버리려고 하는 것을 웃으면서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언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는 교회가 영원히 보존되리라고 신자들에게 다짐하며, 교회가 압박을 받을 때마다 희망을 가지라고 격려한다고 말한다.

칼빈은 이 생각을 우리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 똑같은 "영원성"에서 우리는 영감을 받아 축복된 영생 불사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간단히 말하면, 그리스도의 왕권이 영적인 것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우리 각 사람은 이 말에서 용기를 얻어 더 좋은 생명에 대한 소망을 붙잡아야 하고 이 생명이 지금 그리스도의 손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있으므로, 우리는 오는 시대에 이 은총이 완전히 결실하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2) 그리스도의 왕으로서의 사명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 칼빈은 그리스도의 왕권은 영적인 것임을 깨달을 때에만 우리는 그 힘과 효험을 깨달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평생 십자가를 지고 투쟁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가 어렵고 가련하다는 사실을 보면 이 점이 분명하게 된다. 만일 이 지상 생활의 저 편에서 하늘 임금의 통치의 혜택을 즐기리라는 확신이 없다면, 우리가 그 통치하에 지금 소집되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약속받은 행복은 외면적인 이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칼빈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유익한 대로 우리는 성령의 은사들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에 없는 것이며, 그리스도가 성취한 이 처음 받는 결실에 의해서 우리는 완전한 축복 가운데 하나님과 참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같은 성령의 힘을 믿고, 악마와 세상과 각종 장애물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항상 이기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말 것을 당부 한다. 지금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기의 권능으로 무장하시며 자기의 웅대한 미()로 장식하시며 자기의 부요하심으로 풍부하게 만드신다. 그러면 이런 혜택들은 우리가 자랑할 가장 풍부한 이유가 되며, 악마와 죄와 죽음을 상대로 아무 두려움 없이 싸울 확신을 준다. 끝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입고 세상의 모든 비난을 용감하게 초월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에게 아낌없이 풍부한 은혜를 주시는 것과 같이, 우리 편에서도 그의 영광이 될 만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고 하는 것은 확실히 그를 아버지의 대리라고 부르는 것과 같으며, 이 대리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전적으로 가진 분이라고 말한다. 또한 장차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행하시는 심판은 그리스도의 통치의 최후 조치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자의 사역에서의 왕적 측면으로는, 그가 자신이 죽음에 따른 것을 허락하신 것은 그 세력에 압도되시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위협하며 우리의 몰락한 상태를 기뻐한 그 죽음을 굴복시키시려는 것이었다. 그의 목적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는 것이었다(2:14-15). 이것이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처음 열매라고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우리가 얻는 둘째 효과는 우리가 그의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죽음이 땅에 붙은 우리의 지체들을 죽여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며, 우리 안에 있는 옛 사람을 죽여 번성하거나 결실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한다. 죽음으로 죽음의 세력을 정복한 그리스도의 왕적 사역을 칼빈은 언급하였다. 그러나 인용 말씀에도 있는 인간을 범죄하게 하여 죽음과 심판으로 이르게 하는 마귀를 죽음으로 정복한 사실에 대해서 칼빈은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죽음이 창세기 315절의 원시복음에 대한 성취로서 마귀의 세력을 멸한 왕적 사역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칼빈이 침묵한 것은 아마도 교회 밖의 모든 세상은 마귀의 세력이라고 여기는 매우 극단적인 이원론을 가진 로마 카톨릭을 의식하여 마귀에 대한 언급을 자제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5. 그리스도의 제사장직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순결하고 흠 없으신 중보자로서 자기의 성결로 우리와 하나님을 화해시키시려는 것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운 저주가 우리를 하나님께 접근하지 못하게 하며, 또 하나님은 심판자로서 우리에 대하여 노하신다. 따라서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주시며 하나님의 진노를 풀기 위해서 속죄가 그 사이에 들어와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직책을 다하려고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 자신의 피를 제물로 드려 완전한 속죄 제사를 성취하셨다고 한다. 왜냐하면 율법 하에서 제사장이 피를 들지 않고 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9:7)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죽음을 제물로 삼아 우리의 죄과를 말소하시고 우리의 죄의 값을 치르셨으므로, 제사장직은 그리스도에게만 속한다고 한다(9:22).

결론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씻으신 후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며, 우리의 불결한 범과와 죄 때문에 길이 막혔던 그 은총을 우리에게 얻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들과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서 효험과 혜택을 얻으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칼빈은 이어서 승귀하신 상태에서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영원한 중재자시며, 그의 호소에 의해서 우리는 호의를 얻는다. 기도에 대한 신뢰뿐 아니라, 경건자들의 양심의 평화도 여기서 생긴다. 그들은 아버지 같은 하나님의 자비를 안심하고 의지하며, 중보자를 통해서 성별된 것은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께서 율법 하에서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도록 명령하셨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로운 질서가 있어서 한 분이 제사장과 제물을 겸하게 하셨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의 죄의 값을 치르기에 합당한 것이 달리 없으며, 독생자를 하나님에게 드릴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서 행동하시는 것은 영원한 화해 원칙에 의해서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시며 친절하게 되시도록 할 뿐 아니라, 우리를 이 위대한 직책에서의 동반자로서 받아들이시려는 뜻이다(1:6). 우리 자신은 오염되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제사장이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에게 바치며, 자유롭게 하늘 성소에 들어가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 찬양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하며 향기롭도록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칼빈은 로마 카톨릭의 미사의식을 염두에 두고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으로 만족하지 않고 감히 그를 새로이 제물로 바치노라고 한 자들의 조작은 더욱 가증하다고 비판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자로서의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 자신이 재물과 제사장으로 피의 희생제사를 단번에, 완전하게 성취한 것을 칼빈은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다만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후에 하시는 제사장 사역은 일반적으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셔서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모든 부족한 것이 하나님께 상달될 수 있도록 중재하시는 중보자 사역인데 칼빈은 이러한 역할을 그리스도의 왕적 사역에 포함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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