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이중칭의(double justification) | 박철동 | 2014-07-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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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이중칭의(double justification) 칼빈의 이중칭의를 (1) 배경과 정의, (2) 의롭다함에 대한 상반된 성경구절의 이중칭의적 해석의 정당성, (3) 믿음을 통한 의와 성도들의 선행이 의로 여겨지는 것에 대한 의미와 성격 (4) 성도의 행위가 의로 여겨지는 근거와 의미 (5) 이중칭의가 갖는 실천적 의미로 나누어 기술하고자 한다. 1. 배경과 정의: 칼빈은 그의 첫 번째 요리문답(1537) 19문에서 “하나님이 행하심을 통한 의와 믿음을 통한 의는 어떻게 서로 조화될 수 있는가?”의 질문에 대한 최종적인 답변으로 예수와의 연합(동행)은 값없이 우리가 의롭다고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들이 그 자체는 불결하고 오염되어 있지만 그리스도가 전적인 정결함과 거룩함으로 덮으셔서 의로 여겨지고 영원한 상급(reward)으로 보상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이 1559년 “기독교강요” 최종판 3권 칭의의 내용 중 17장에서 “율법의 약속과 복음의 약속과의 조화”에서 보다 풍성한 의미로 이어진다. 이러한 주제는 성경에서 많은 부분에서 어떤 행함 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이를 의로 여기신다는 구절들과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구절들을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볼 것인가에 대한 현실적인 필요에 따른 것이라고 보인다. 왜냐하면 로마가톨릭은 이러한 구절들을 들면서, 믿음도 중요하지만 선행이 의롭다함을 받는 데로 이끌거나(행 10장, 고넬료 등), 의롭게 되게 한다고(시 106편, 비느하스 등) 말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에 대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 여기에는 어떤 행함도 공로로 필요로 하지 않지만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의 선행은 그 자체가 불완전하고 오염되어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행할 때 그 선행이 그리스도의 의와 정결함으로 덮혀져 하나님 앞에서 의로 받아들여진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중칭의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을 때에 그리스도의 무죄로 우리의 불의가 덮여지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의롭게 되는 것과 같이, 우리의 행위도 모든 허물이 그리스도의 순결로 묻혀 버리며 우리에게 책임이 돌려지지 않기 때문에 의롭고 또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당연히 믿음으로만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까지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 2. 의롭다함에 대한 상반된 성경구절의 이중칭의적 해석의 정당성 칼빈은 “기독교강요” 17장 전체 중 5장을 행 10장의 고넬료의 예를 들어 믿음과 함께 선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견해를 논박한다. 특별히 그들이 천사가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늘에 상달되었다고 한 말을(행 10:31), 사람이 선행에 대한 열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준비를 하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에 대하여 사실상 고넬료가 진정한 지혜, 즉,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진 것을 보면 이미 지혜의 영의 조명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바울이 성령의 가장 확실한 열매라고 가르친 의를(갈 5:5) 실천하고 있었으므로 성령에 의해 성결케 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에게 있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했으나 그는 이 일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고, 자기의 노력으로 이 일들을 함으로써 은혜를 받을 만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받아들이시는 유일한 이유는 사람을 그대로 버려두면 완전히 멸망할 것을 아시고 그의 멸망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를 해방하시려고 자비를 베푸시는 데 있다면서 참으로 성경에는 어디를 찾아보아도 이 교리를 반대하는 말씀이 한 마디도 없다고 단언한다. 여기서 고넬료가 베드로로부터 베드로를 만나기 전에 중생한 상태에 있었는지 여부는 성령론과 세례론의 관점 가운데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본 주제와 연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고자 한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중생한 자의 선행을 기뻐하시는가? 칼빈은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양자로 삼으시는 은혜로 사람을 자신의 자녀로 성별케 하셨고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하셔서 새로운 생명의 모습으로 만드셨으므로 이제는 그의 영의 선물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를 포용하신다고 말한다. 이것이 베드로가 언급한 "받으신다"는 것이며, 신자들은 부르심을 받은 후에 이 용납에 의해서 그 행위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위 때문에 신자들을 "받으시는" 것은 오직 자신이 그 행위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란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경건한 자들도 죽을 육에 싸여 있기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죄인이며 그들의 선행은 아직도 불완전하며 육의 죄악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에 대해서나 그 행위에 대해서나 그대로는 받으실 수 없고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만 포용하실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의를 지키는 자들에게 친절하시며 자비로우시다고 증거하는 구절들은 이런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이중으로 용납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성경의 구절들을 서로 부합하도록 해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3. 믿음을 통한 의와 성도들의 선행이 의로 여겨지는 것에 대한 의미와 성격칭의에 대해서는 칼빈은 앞부분에서 충분하게 논의했다. 이중칭의를 말하는 17장에서 칭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그리스도와 교제를 하게 된 죄인은 은혜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되어 죄의 용서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의를 자기의 의같이 입고 하늘 심판대 앞에 자신 있게 서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지 않으면 그 의에 도달하지 못하며, 율법을 범할 때마다 그 의를 깨뜨리게 된다. 율법은 의만을 명령하므로, 율법의 입장에서 보면 율법에 있는 계명들은 그 하나하나가 의로운 행위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율법을 지킴으로 의에 이를 수 없음을 분명하게 말한다. 그러나 죄를 용서받은 후에 따르는 선행은 그 자체의 가치에 의하지 않고 다른 입장에서 평가된다. 행위에 있는 모든 결함은 그리스도의 완전성으로 덮이고, 모든 오점은 그리스도의 순결로 깨끗케 되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모든 허물의 죄책이 도말되고, 선행까지도 항상 더럽히는 허물의 불완전이 묻혀 버린 후에는, 신자들이 행하는 선행은 의롭다고 간주된다. 바꿔 말하면 의로 인정된다고 칼빈은 말한다(롬 4:22). 아브라함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고 한 것보다(롬 4:3, 갈 3:6) 더 확고한 증명은 없다. 비느하스의 행위에 대해서도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라고 했으므로(시 106:31) 믿음에 관한 바울의 주장을 보아서 우리는 행위에 관해서도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만일 이 행위의 의가 그 성격이 어떻든 간에 믿음과 값없이 얻은 칭의에 의존한다면, 또 후자에 의해서 실현된다면, 그것은 믿음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를테면 원인에 대한 결과와 같이 믿음에 종속시켜야 한다. 행위의 의에는 이신칭의를 배척하거나 흐려지게 할 권리가 전혀 없다고 말한다. 4. 성도의 행위가 의로 여겨지는 근거와 의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행위를 완전한 것같이 시인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인정하는 근거를 생각해 본다면 모든 곤란은 해결될 것이라고 칼빈은 말한다. 여기서 용서를 받은 후에 하는 행위라야 용납되기 시작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보시지 않으신다면 이 용서는 어디서 오는가?라고 반문한다. 이미 첫 장에서 언급한 칼빈이 정의한 이중칭의의 내용을 다시 반복하고자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을 때에 그리스도의 무죄로 우리의 불의가 덮여지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의롭게 되는 것과 같이, 우리의 행위도 모든 허물이 그리스도의 순결로 묻혀 버리며 우리에게 책임이 돌려지지 않기 때문에 의롭고 또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당연히 믿음으로만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까지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행위의 의는 믿음에 종속되고 믿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격찬하는 모든 복도, 사람이 죄를 용서받고 복을 받기까지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사람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죄의 용서를 받음으로써 복을 받은 후에는 다른 복들도 자리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로 얻는 복은 최고의 또 가장 중요한 복일 뿐 아니라, 유일한 복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만일 이것만을 근거로 삼은 다른 종류의 복이 이 복을 해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별문제일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다윗은 그의 손이 깨끗하기 때문에 상을 받았다고 언명하면서도(삼하 22:21) 그 근원을 가리키는 것을 잊지 않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다고 하였다(삼하 22:20). 거기서 다윗은 자기의 입장이 선하다는 것을 말하지만, 모든 선행에 선행하며 그 원인이 되는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칼빈은 신자들에게 보통 적용되는 "의롭다"는 단어에 대해서 고심할 이유가 훨씬 적어졌다고 말한다. 사람을 의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생활이 거룩하기 때문인 것이 부분적인 의미를 가질지라도,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의 자체를 실현한다기보다 의를 추구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을 뿐이므로, 그들의 의는 이신칭의에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신칭의가 그 근본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일 행위에 의한 의는 그 성격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인정되든지 간에 이신칭의에 의존한다면, 이신칭의는 이 관계로 인해서 약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더욱 강화되며, 그 힘은 더욱 강력하게 빛나게 된다. 또 우리는 값없이 주시는 칭의를 얻은 이후에 따르는 행위를 중시하더라도 그런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하는 기능을 떠맡는 것같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는 행위가 이 기능을 믿음과 나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이신칭의가 전적으로 유지되지 않으면 행위의 불결이 폭로될 것이다. 또한 사람이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으므로 그 자신이 의로울 뿐만 아니라, 그의 행위까지도 자체의 가치 이상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조금도 불합리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5. 이중칭의가 갖는 실천적 의미 "네 하나님 여호와는‥‥‥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라고 할 때에(신 7:9) 이 말씀은 성실한 마음으로 주와 언약을 맺은 주의 종들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며, 주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그 보여주는 방법은 이렇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의 은혜를 내려주시는 목적은 우리가 그를 사랑하며 두려워하며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므로, 성경에 있는 모든 자비의 약속들은 당연히 이 목적, 즉, 우리가 그 유익을 주시는 분을 경외하며 공경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을 선대하신다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이런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켜야 할 항구적인 의무를 지적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경외하기 위해서 그의 자녀로 결정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앞부분에서 율법의 본질을 세 가지 용도와 함께 충분하게 언급하였다. 여기서는 율법이 가지는 “항구적인 의무”를 그 본질적인 측면으로 제시하고 있다. 칼빈 이후에 많은 개혁주의 신조들과 교의학에서는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이 반영된 것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모든 시대와 모든 인간에게 영원한 구속력을 갖는다는 관점과 동일한 견해이기도 하다. 칼빈은 이러한 율법의 속성을 율법을 행함으로는 의에 이를 수 없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의에 이를 수 있는 것과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행하는 선행인 율법에 대한 순종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신다는 이중칭의를 성경적인 관점으로 제시하여 복음과 율법에 대한 풍성한 의미와 적용을 조화롭게 이끌어 낸다. 따라서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믿음으로 ”양자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항상 부르심을 받은 쪽을 향해서(in the direction of our calling) 노력해야 한다."는 적용적인 권면을 한다. 여기서 이 본문을 원문에 맞게 보다 충실하게 보완한다면 “우리는 항상 부르심에 합당한 지시하심을 위해(quo tendit nostra vocatio) 노력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과 16장에서 각각 자신의 사도직의 사명을 사람들을 불러 “믿음의 순종”에 이르게 하는 것에 있다고 말하였다. 믿음과 순종(성도의 선행)은 원인과 결과이면서 동시에 서로를 확증하고 모두가 하나님 앞에 의로 여겨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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