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십자가의 신학 | 박철동 | 2016-10-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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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십자가의 신학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을 그러한 신학을 전개한 (1) 배경과 과정, (2) 십자가 신학의 내용, (3) 십자가의 신학의 의의로 나누어 기술하고자 한다. 1. 배경과 과정: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는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이 세 흐름의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한다. 첫째는 인문주의의 영향이다 루터는 분명 인문주의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유사점 또한 지니고 있었다. 인문주의와 루터 모두 스콜라주의를 거부했고, 초대교부와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며, 수사학에 관심을 가졌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인문주의운동에 빚을 지고 있었고, 인문주의는 종교개혁의 ‘촉매제’ 혹은 ‘산파’ 의 역할을 하였다. 둘째는 중세 후기의 유명론 혹은 새길(via moderna, 근세 혹은 현대로 번역하는 modern은 실제로는 ‘새로움’이란 뜻을 가진다.)이라 불리던 사상의 영향이다. 오캄(william of Ockham)의 ‘직접성의 원리’와 ‘독자성의 원리’로 새길을 지향한 사상은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의 헬라 철학적 영향을 거부하고 신학과 철학의 분리를 주장하였고, 근세나 현재에도 인문학에서 연구대상이 되는데, 루터는 오캄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의 ‘십자가의 신학’이 ‘새 신학’이라고 불러지기도 했다. 셋째로 신(新)아우구스티누스학파의 영향이다. 루터는 ‘은총의 박사’ 로 불리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으로부터 은혜로 인한 의로움이라는 생각을 배우게 되었다. 루터는 십자가의 신학이란 용어를 히브리서 강의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직접적으로 십자가의 신학이 개진된 것은 루터가 1518년 하이델베르그에서 그의 “새 신학”을 어거스틴 수도회의 독일 총회 앞에서 설명하고, 변호하도록 요청되었을 때이다. 이 때 제시된 것이 하이델베르그 논제이며, 이 논제에서 루터는 후에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불려지는 그 자신의 견해를 표출하였다. 2.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의 내용 처음의 루터의 관심과 어려움은 ‘“하나님의 의”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그의 신학 전체는 다시 검토되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서 루터는 십자가의 신학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은 그의 전 신학을 관통하는 한 원리이며, 그 중심에는 ‘이신칭의’가 있다. (1) 하이델베르그 논제의 구조와 십자가의 신학: 여기서 다룬 논제들은 네 부분으로 나눈다. 첫째 논제는 죄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면서, 인간의 행위의 본질과 가치를 다루고 있다. 두 번째 부분의 논제는 죄를 피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의 무능력을 다루고 있다. 세 번째 부분의 논제는 위대한 분리로, 즉 영광의 신학자와 십자가의 신학자의 분리이다. 마지막 논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신자들을 존재에로 이르게 하는 창조적인 행위라는 것을 다루고 있다. 모든 인간적 가능성이 고갈될 때 그리고 인간이 무의 존재가 될 때, 무로부터 창조하는 자가 그의 “고유한 일”을 한다. 이러한 분석들을 통해서 루터는 어떻게 십자가의 신학으로 연결 되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즉 하나님의 인간 구원을 위한 사역은 결국 하나님의 낯선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고유의 사역이 완성된다는 것이며. 그 과정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칭의의 방법과 내용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2) 십자가의 신학과 영광의 신학: ‘십자가의 신학’과 ‘영광의 신학’이라는 표현은 앞에서 언급한 하이델베르그 논쟁 당시 루터가 사용 한 것이다. 특별히 신 인식과 연관하여, 중세의 신학을 ‘영광의 신학’이라 칭할 때 ‘십자가의 신학’과의 비교는 다음과 같다. 이성과 신앙의 단절, 철학과 신학의 차이를 강조했던 오캄의 사상과 친숙했던 루터는 이 두 영역의 분리를 주장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이 루터가 신학에서 철학의 사용을 강력하게 반대했던 사정을 부분적으로 설명해 주지만 신학적 이유가 보다 결정적이었다. 그것은 바로 올바른 성경 해석학에 대한 탐구였다. 루터는 당시의 성경 연구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용어와 변증술로 뒤 덮혀 있었다고 비판하면서 스콜라 신학에 사용된 철학적 언어를 피하고, 성경의 언어와 정신이 가지는 특수성을 포착하는 것을 자신의 주석 작업의 원칙으로 삼았다. 루터는 스콜라 신학을 비판하면서 특별히 신학에 철학을 도입한 것 즉, 신학의 ‘철학화’를 공격한다. 그 배경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오캄과 같은 ‘새길’사상은 헬라철학적 기반을 넘어설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사실 후기 스콜라 신학은 학교에서 변증술의 활동 자체가 그 목적이 되는 경향이 되었다. 이러한 일탈에 맞서서 루터는 이 두 학문 사이의 단절을 강조한다. 루터는 “신학은 하늘에 속한 것을 다루는 것이고, 철학은 땅에 속하는 것을 다루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루터는 “참된 신학과 하나님 인식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 즉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유일하게 정당한 것으로 남아 있는 십자가의 신학은 신앙에 의한 하나님 인식 외에 다름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루터는 당시 신학을 지배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중 ‘형이상학’, ‘윤리학’ 등과 같은 신학적 영역을 다루는 것에서는 철저히 비판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수사학’, 등이 보존되어 그것이 새롭고도 간결한 형태로 읽힌다면 말과 설교의 기술을 훈련하는 젊은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 이제 루터는 창조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자하는 자연 신학과 사색적 형이상학, 즉 종교적 지성주의는 도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행위의 의와 통일한 범주에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양자의 일치를 인식하여, 이 두 가지가 십자가에 반대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둘이 십자가에 반대된다는 것은 루터 신학의 가장 중요한 통찰력에 속한다. 왜냐하면 양자 둘 다 인간이 자신을 하나님의 수준으로 올리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두 길은 사람을 교만으로 이끌거나 아니면 이미 그 자체가 그런 교만의 표현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둘 다 인간의 자아를 부풀게 한다. 영광의 신학은 하나님의 분명한 신적 능력, 지혜, 영광을 통하여 직접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반면 십자가의 신학은 바로 하나님이 자신을 감추시는 곳에서, 그의 고난 가운데서, 영광의 신학이 약하고 어리석다고 간주하는 모든 곳에서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한다. 그리하여 영광의 신학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도록 이끌고, 율법을 성취할 때 자신의 윤리적 성취에 기초하여 흥정을 벌이지만, 십자가의 신학은 인간을 고난 받기 위하여 부름 받은 자로 간주한다. 그리고 오히려 인간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자신의 죽음을 보면서, 자유로운 존재로의 가능성을 갖는다. 죄인의 눈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은 성육하신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기를 인간에게 계시하신다. 이렇게 해서 십자가의 이야기는 인간의 이야기가 된다. 만약 십자가의 이야기가 인간의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영광의 이야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노력으로는 다른 길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식으로의 모든 상승은 그리스도의 비하를 통해 이루어진 지식을 제외하고는 위험하다. 왜냐하면 이것이 야곱의 사닥다리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지혜 있는 자의 지혜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는 신학은 죄의 고통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실천적인 것이었다. 즉 영광의 신학은 인간의 하나님으로의 상승운동이지만 십자가의 신학은 참된 신학으로 죄된 인간에게로 하나님이 하강하신다는 것이다. (3) 칭의에 있어서 십자가가 가진 의미: 루터는 인간의 타락 이후 참된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으로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십자가의 신학만이 참된 하나님 지식으로 인도하여 인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과 그가 인간에게 뜻하시는 바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① 칭의의 근거로서 낮추시는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는 하나님의 모든 실재들이 숨겨져 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력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력함과 비천함을 통해서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그의 분노 아래 숨겨진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의 은혜와 선물은 십자가 아래 숨겨져 있다. 그의 신성한 사역들조차도 그의 수난의 비하 속에 감추어졌으며,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강림하셨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을 겸손과 십자가의 수치 속에서 인식하지 않는다면 그 영광과 위엄 속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그에게 선한일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감추이심은 하나님의 낮추심을 의미한다. 또한 성자는 인간에 대한 심판의 상징이기 때문에, 자기 확신적 도덕주의적 인간 면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이루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 실패하는, 사랑하는 대상을 구하기 위하여 그에게로 오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은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온다. 그것은 십자가의 신학의 결과이다. 하이델베르크 논제의 ‘작용시키는 힘’의 가장 심오한 본성은 이제 선언되었다. 그것은 사랑, 무로부터 창조하는, 존재에로 부르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것이 인간의 칭의의 근거이다. ② 신앙의 시작으로서 십자가의 능력: 두 번째로 십자가의 신학이 가르치는 것은 십자가의 능력이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도달하려는 방법과 내용에서 대조된다. 십자가는 그 능력에 있어서 첫째,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격이며, 둘째로 죄로부터의 구원으로 동시에 그것은 진정한 죄의 자리는 육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인 포부 즉 인간의 “영광의 신학” 속에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리고 십자가는 새로운 것이 부활의 예수 속에서 옛 존재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십자가는 그리고 십자가만이 죄인의 옛 자아와 그 신학에 대항하여 새로운 그리고 들어 보지 못한 가능성을 열 수 있다. 루터에 따르면 십자가에 의한 죽음은 먼저 개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만날 때 즉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가 죽었다는 것, 버려졌다는 것을 깨달을 때 얼어난다. 그리고 그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한 기만을 죽이며, 어떤 다른 나갈 길이 있다는 생각을 죽인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신학은 이 “나”가 죽어야 하며 그래서 새로운 “나”가 그 자리를 채워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기를 원한다면, 그는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만 하는데, 인간 대신 실제적으로 그리스도가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것이 될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은 오직 그것이 인간 자신의 죽음이 될 때 그를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인도하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숙고하는 것은 반드시 그와 함께 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이 시작된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 후에는 부활이 있다. 하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인간 안에 그의 의지를 드러내시고 일하신다. 즉 하나님은 개인의 삶 속에 들어와서 옛 것을 죽이고, 새 것을 살려내시는 것이다. 참으로 부활 없이 그리스도의 신학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활이 일어나려면 먼저 죽음이 있어야하였다. 그 후에 새 삶이 시작될 수 있으며 그리고 그것으로 자아-가치에 대한 새로운 의미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이델베르크 논제의 전제는 부활에의 소망으로, 하나님은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가져오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활이 있기 때문에 죄인은 죽어야만 하고, 하나님 앞에서 무(nothingness) 가 되어 가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사랑에 의해서 부어지는 의롭게 하시는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된다. 요컨대 십자가와 부활 속에서 하나님은 전적으로 새로운 것, 인간이 옛 행동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방법까지 포함한 옛 것을 끝내는 어떤 것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은 새 피조물을 만드는 힘이다. 그의 자리에 새 사람, 신앙의 사람이 출현하였다. 이제 신앙에 의한 칭의라는 종교개혁의 중심 가르침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이 루터가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라고 한 것의 의미이다. 루터는 “그리스도 수난의 실제의 그리고 참된 행위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확증하게 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것이 십자가의 목적이며, 신앙의 시작이다. ③ 칭의의 과정과 그리스도와의 동일화 루터는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플라톤주의 영향이나 감상주의 등은 배척한다. 대신 복음에 대한 그의 개념에 의해서 “인간”과 “신성”이라는 용어 대신에 “죄 많은 인간의 상태”와 “하나님의 의”로 그 개요를 바꾸어 놓았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에 자신을 주시고 (단순히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인간이 됨으로써), 교환 속에서 그는 자신의 의를 인간에게 전달시키신다. 이것이 루터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관점이다. 그리스도의 사죄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세 가지 유형의 교리는 대리적 만족설, 승리설, 모범설이다. 이전에 학자들은 루터가 대리 만족설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정하였다. 좀 더 최근에는 루터가 승리 사상을 견지했다고 많은 이들이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같은 용어를 어떤 때는 저것을, 어떤 때는 다른 것을 제안하는 것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이제 그 의미를 십자가의 신학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 또한 가능하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것은 그의 아들을 보낼 정도로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옛 것을 끝내고 새로운 어떤 것을 시작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루터가 대리 만족설을 거부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루터는 이 사상을 거부하고 그 대신에 형벌을 선택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자리에서 죽었다. 그는 그 형별 속으로 들어갔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것은 인간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의 자리에서” 죽었다. 즉 그는 인간이 죽어야 하는 자리에 완전하게 들어감으로써 자신을 인간과 동일시 시켰다. 그는 인간을 “대신해서” 죽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에 “앞서서” 죽는다. 인간과의 이러한 동일화로 그리스도는 인간 안에 있는 옛 아담을 죽이고, 인간의 죽음을 죽는다. 그리고 죽음에서의 그와의 동일화는 새 부활의 삶 속에서 그와의 동일화로 이끈다. 그리스도가 실제로 인간을 위해서 죽었다는 사실은 인간이 실제로 의로워지는 근거를 형성한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단순히 사죄에 관한 교리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죄의 실제적 성취에로 이끈다. 3.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의의: 십자가의 신학은 죄인들의 마음속에 믿음을 일으키고 유지 시킨다. 특별히 그 중심에 있는 이신칭의는 복음이 비참한 죄인들을 구원한다는 믿음에 대한 직접적인 대상이다. 이를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십자가 신학에서의 이신칭의의 다른 주제들은 우리와 떨어져 있고 우리를 인도하거나 경험속으로 들어가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죄의 용서에 대한 주제는 우리를 연속적으로 매일의 경험을 갖게 하고 끊임없이 여러분과 나를 터치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다는 것을 알거나 설교를 한다고 해도 내가 죄사함 받은 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와 같이 루터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신학과 그 중심에 있는 이신칭의와 이에 대한 믿음은 여러 교리들 중에 하나가 아닌 모든 교리들의 기반이며 시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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