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두 본성과 한 인격 (칼케돈 공의회를 중심으로, A.D. 451년) | 박철동 | 2017-02-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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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교회는 2세기부터 조직적으로 발생한 이단(마르키온, 몬타누스, 영지주의 등)과 교회 내에서의 신학적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 중심에 니케아 공의회(325년)까지는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신가? 에 있었다. 이를 부정한 아리우스주의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죄되었다. 그 이후로는 주로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 이시라면 두 본성이 어떻게 한 인격 안에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플라톤주의 영향 아래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고 신성과 인성의 통일성을 중요시하였다. 반면에 소아시아 지역에 있었던 안디옥 학파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과 인성 양성을 중요시했다.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아폴로나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인성은 로고스가 그의 영혼을 취하였다고 주장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상을 부인했고 381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정죄되었다. 반면에 안디옥 학파의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 두 본성이 마치 결혼한 부부와 같이 긴밀한 인격적인 연합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고 42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정죄되었다. 그 이후에 유티케스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서로 합하여 다른 형태의 존재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448년 콘스탄티노플 지방대회는 유티퀘스를 정죄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쿠루스가 정치적 목적으로 유티퀘스를 지원하였고 데오도시우스 황제를 설득하여 449년 에베소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유티케스의 단성론을 정통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는 로마 감독 레오 1세에 의해 ‘강도회의’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 회의의 합법성은 부인되였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600여명의 감독들이 모여 치열한 논쟁을 벌렸고 유티케스를 정죄하고 다음과 같은 신조를 채택했다. (1)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정을 지녔다. (2) 그리스도의 이러한 두 본성은 한 인격체인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며, (3) 두 본성 안에서(in two natures) 신성과 인성은 - 혼동되지 않고(unconfusionly, 유티케스 견해 거부), 변화되지 않고(unchangely), 분열되지 않고(unseperately, 네스토리우스의 견해 거부), 나누어지지 않는다(undivisionly) 라는 4개의 부정부사를 사용하여 두 본성의 관계를 정리하였다 후에 동방교회에서는 ‘두 본성 안에서’를 ‘두 본성으로부터’(out of two natures)로 변경 했다.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이 한 인격 안에 있음을 확정했다. 이러한 두 본성 가운데 두 본성은 혼돈이 없고, 변화가 없고, 분열이 없고, 분리가 없다는 4개의 부정부사를 사용하여 오늘날까지도 유용한 기독론의 범주(boundary)를 제공한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은 고대 교회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모든 계시의 완성이며 모든 인류 역사의 중심점이다. 성육신을 중심으로 인생관, 세계관, 역사관 등이 그 자리를 잡고 의미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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