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에게 드리는 헌사 | 운영자 | 2014-07-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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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에게 드리는 헌사
지극히 위대하시며 고명하신 군주시며 가장 그리스도교적인 프란시스 폐하께 죤 칼빈은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와 구원을 삼가 기원하나이다 1. 책이 처음 쓰일 당시의 배경 지극히 위대하신 폐하시여! 내가 이 책을 처음 쓰기 시작할 때는 이후에 폐하께 드릴 수 있는 책을 쓰겠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였습니다. 다만 나는 몇 가지 기초적인 원리를 서술하여, 종교에 열성 있는 사람들이 진실된 경건의 생활을 이루도록 하려는 것에 도움을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특별히 나의 동포 프랑스 사람들을 위하여 저술하였는데,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주리고 목마른 것처럼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있으나 그리스도에 대한 아주 작은 지식마저도 바로 알지 못하는 자가 매우 소수인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펜을 들게 된 의도라는 것은 이 책 자체가 증명하는 것처럼 그 내용이 단순하고 기초적인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악한 자들의 횡포가 극도에 달하여 폐하의 나라에서 건전한 교리가 발붙일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책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나의 신앙고백을 폐하께 보여 드릴 수 있다면, 이것으로 나는 보람 있는 일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나는 현재 불과 칼로 나라를 소란하게 하고 있는 그 광인들에게 광적인 분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교리의 성질이 어떤 것인지를 폐하께서 알게 되신다면 천만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끄럽게 떠들어대면서 이 교리는 마땅히 투옥과 추방, 몰수와 화형의 처벌을 받아야 하며, 육지에서나 바다에서 완전히 송두리째 없어져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여기서 이 교리의 개요를 고백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주장을 폐하께서 가능한 증오하시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교활한 방법으로 폐하께 아첨하였는가를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그들을 문책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된다고 하면, 그들의 말과 행동에 있어서 죄가 없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폐하께서는 그 관대하심에 따라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교리에 대한 증오심을 조장하기 위하여, 내가 폐하께 설명하려는 교리가 모든 사람의 판단과 법정의 많은 판결에 따라 벌써 오래 전에 정죄 받아 왔다고 주장하려 하여도, 그것은 이 교리가 편파적으로 반대자들의 음모와 세력에 의하여 맹렬하게 거절당했다는 것과, 또 거짓과 음흉함과 비방으로 교활하게, 그리고 기만적으로 억압을 받아 왔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무런 변호도 듣지 않고 이 교리에 대하여 가혹한 선고를 내리시는 것은 참으로 잔인한 처사이며, 따라서 이 교리를 반역과 악행으로 몰아 부당하게 비난하시는 것은 기만인 줄로 압니다. 가장 고귀하신 폐하시여! 우리가 개탄하는 것을 어느 한 사람도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폐하께서 매일 같이 들으시는 것처럼 중상 모략하는 저 거짓된 비방에 대하여 폐하 자신이 증인이 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비방은 이러합니다. 곧 제왕의 주권을 탈취하며, 모든 법정과 그 판결을 전복시키며, 모든 질서와 정부를 전복하며, 사회의 평안과 안녕을 교란시키며, 모든 법을 폐기하며, 모든 통치권과 소유를 분산시키는 것, 간단히 말해서 모든 것을 혼란의 와중으로 몰아넣으려고 하는 것이 곧 내가 고수하는 교리의 유일한 목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들으신 비난은 지극히 적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재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무서운 소문들이 널리 퍼져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러한 비방들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온 세계는 이 교리와 그 주장자들을 수천만 번 화형과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처사인 줄 압니다. 이와 같은 가장 악독한 비방이 그대로 인정된다면 일반 대중이 이 교리에 대하여 증오의 마음을 품는다고 해서 누가 이상하게 생각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와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서로 일치하며 우리의 교리를 정죄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까닭인 것입니다. 재판석에 앉는 자들은 이러한 감정에 사로잡혀 벌써 집에서 출발 할 때부터 가진 편견으로 판결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백이나 확실한 증거에 의해 유죄로 판결된 것 이외의 것만 처벌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책임을 바로 수행하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죄로 유죄 판결이 나왔습니까? 그들은 이 정죄 받은 교리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무슨 권리로 그들이 이 교리를 정죄하였습니까? 이제 옹호의 보루는 이 교리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진리로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한 마디 변명의 권리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2. 핍박을 받고 있는 신앙 동지들을 위한 탄원 무적(無敵)의 폐하시여!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폐하께서 충분한 심리를 해주시도록 요구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혼란 속에서 이 주장은 전혀 법질서에 따라 취급을 받지 못하였으며, 또한 법적으로 신중하게 다루어지기보다는 오히려 난폭한 격정(激情)에 따라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내가 안전하게 조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얻기 위해, 지금 개인적인 변호를 꾸미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옵소서. 물론 사람마다 조국에 대하여 당연히 품어야 할 그런 애정을 나 역시 느끼고 있으나, 현재와 같은 사정 아래에서는 조국에 있지 못함을 조금도 유감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그리스도의 주장이자 모든 신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주장을 지금 변호하려는 것뿐입니다. 이 주장은 현재 폐하의 나라에서 완전히 찢기고 유린당하여 가장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으며, 이것도 폐하의 승인도 없이 어떤 바리새인들의 횡포에 의해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자행하게 되었는가를 지금 여기서 묻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비록 그리스도의 진리가 근절되고 파멸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불경건한 자들의 득세로 인하여 그것이 감추어지고 매몰되어 잠복상태에 빠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련하고 불쌍한 교회는 잔인한 학살로 인하여 쇠잔해지고, 혹은 추방당하고, 혹은 위협과 공포에 압도되어 감히 입 한번 열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상습적인 분노와 광란으로 이미 흔들리고 있는 벽을 계속 쳐서 그들이 시작한 그 일을 기필코 끝장을 내고야 맙니다. 한편 이러한 광포에 맞서서 교회를 변호하고 수호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가장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려는 자들이 있기는 하나, 그들은 다만 무지한 사람들의 그 잘못과 무분별을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리하여 이 온건한 사람들은 그렇게 말함으로써, 그들이 알고 있는 오류와 무분별을 하나님의 정확 무오한 진리라고 부르며 그리스도께서 하늘나라의 지혜의 신비를 주시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조금도 멸시하지 않으신 지성 있는 사람들을 무지한 사람들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모두가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영명하신 폐하시여! 특히 지금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서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진리가 그 존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왕국이 우리들 가운데 잘 보존될 수 있을까 하는 매우 중대한 문제가 기로의 선상에 놓여 있는 이때에 폐하께서는 이런 정당한 변호에 대하여 귀와 마음을 막지 않으셔야 할 것입니다. 사실 이런 문제들은, 폐하께서 들으실 만한 가치가 있으며, 인정하실 만하며, 폐하의 보좌에 합당한 문제입니다. 사실 진정한 왕국을 통치함에 있어서 자신이 하나님의 사역자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나라를 통치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 왕은 이미 왕의 통치를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약탈을 자행하는 처사인 줄 압니다.}더욱이 자기 나라가 하나님의 홀, 곧 그의 거룩하신 말씀에 의해 통치되지 않는데도 그 나라의 영구한 번영을 기대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잠언 십구장 십팔장)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 무오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우리의 비천함을 소홀히 한 나머지 우리의 주장을 들으시려는 노력을 단념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미천한 소인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비참한 죄인들이며, 사람들 보기에는 가장 천대를 받을 존재입니다. 그리고 만일 폐하께서 부르고 싶으시다면, 우리를 이 세상의 배설물이나 찌꺼기라고 불러도 무방하며 이보다 더 추악한 이름을 붙여도 마땅한 존재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고 다만 그의 긍휼밖에는 자랑 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오직 이 긍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영원한 구원의 소망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사람 앞에서도 우리의 연약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이 연약하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조차도 최상의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리는 세계의 모든 영광 위에 우뚝 솟아나야 하며, 어떤 세상의 권세가 추종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교리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인데, 성부께서는 이 그리스도를 왕으로 세우셔서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예언자가 주의 통치의 위엄에 대하여 예언한 것처럼 토기장이가 질그릇을 쳐서 산산조각으로 부스러뜨리듯이 하나님은 철과 구리처럼 강하고 금과 은처럼 찬란한 온 세상을 그의 입을 막대기로 쳐서 흩어버리실 것입니다. 실로 반대자들은, 우리가 거짓되게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자신의 핑계로 삼아, 오히려 그것을 악하게 부패시킨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악의에 찬 중상모략일 뿐만 아니라, 심히 뻔뻔스러운 파렴치한 행동이라는 것은 폐하께서 우리의 신앙고백을 읽으시면 친히 아시고, 판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폐하의 열심과 관심을 일으키기 위해서 적어도 우리의 신앙고백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무엇인가 더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모든 예언은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고 주장하여, 성경 해석의 확실한 표준을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이 표준에 따라 우리의 신앙이 검토되기만 한다면, 승리는 틀림없이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옷을 입기 위해 일체의 덕을 벗어 버렸다는 것, 하나님에 의해 생명의 충만함을 얻기 위해 우리에게는 어떠한 선도 없다는 것,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가 죄의 노예라는 것,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빛을 받아야 할 소경이라는 것, 우리는 하나님에 의하여 바로 세워져야 할 절름발이라는 것,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할 약한 자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만이 홀로 영광을 받으셔야 하며, 하나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자랑하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기회를 우리에게서 제거하였다는 것,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는 것 보다 더 신앙과 일치하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러한 사실과 이와 비슷한 것들을 말하면, 반대자들은 우리의 말을 가로막고, 그것은 자연의 맹목적인 빛, 가공적인 준비, 자유 의지, 영원한 구원의 공로가 되는 선행 그리고 일체의 공덕까지도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불평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선, 덕, 의, 지혜에 대한 찬양과 영광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려져야 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생명의 샘에서 물을 너무 많이 마셨다고 책망 받았다는 말을 우리는 아직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스스로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판" 사람들이 책망을 받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형제요 화목자로 믿는 곳에 하나님이 화목케 하시는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과 또 우리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그 하나님으로부터 일체의 번영과 축복을 기대하는 것보다 더 신앙에 적합하고 또 신앙과 일치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에 대하여 생각하고,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보물, 곧 구원과 영생에 대하여 확실한 기대를 가지는 것보다 더 신앙과 일치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서 그들은 우리를 반대하며 그러한 신뢰의 확신은 오히려 교만과 억측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고 떠듭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서는 아무것도 기대해서는 안 됨과 동시에, 하나님에게만 모든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을 자랑하기를 배우는 일을 위해서 우리의 모든 헛된 자랑을 내버립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가장 위대하신 폐하시여! 우리가 주장하는 모든 부분을 자세히 살펴 주십시오. 만일 우리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두고" 또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를 위하여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임을 폐하께서 확실히 찾지 못하신다면, 그 때는 우리를 악한 자들 중의 가장 악한 사람들로 생각하십시오. 이러한 소망 때문에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쇠사슬에 결박을 당하고, 채찍을 맞고, 웃음거리로 질질 끌려 다니고, 인권을 박탈당하고, 잔인하게 고문을 당하고, 또 이를 피하여 달아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모두가 극단의 곤경에 빠져 무시무시한 증오로 저주를 받으며, 중상모략으로 상처를 입고 최대의 모욕적인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반대자들을 보십시오. 반대자들은 사제계급에 속하는 자들로, 이 성직자들의 명령과 지도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적대 행위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어떤 열심에 움직이고 있는가를 나와 함께 잠깐 동안이라도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고 모든 사람 중에 그 위치가 마땅히 확립되어 있어야 할 참 종교가 그들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의해 무시를 당하고, 소홀히 다루어지며, 멸시를 받고 있다는 것을 그들도 주저하지 않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네가 말하는 소위 맹목적인 신앙으로 교회의 판단에 복종하기만 하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든지 믿지 않든지 이런 것은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사도직의 수위성과 그 거룩한 모교회의 권위를 반대만 하지 않으면, 비록 하나님의 영광이 공공연하게 모독을 당해 더렵혀져도 조금도 마음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들은 미사니, 연옥이니, 순례니, 혹은 이와 비슷한 사소한 것들을 위하여 그렇게도 잔인하고 맹렬하게 싸우고 있으며, 가장 확실한 신앙이 없이는 경건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습니까? 이런 것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으로써는 하나도 입증될 수 없는 것들이 아닙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그들의 신은 배요" 그들의 부엌을 종교로 삼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들이 없으면 그들은 벌써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일 수도 없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는 사치스러운 음식으로 배불리고 있으며, 또 어떤 이들은 마른 빵 껍질을 씹어 먹고 있으나, 모든 사람은 이러한 연료가 없어 식어버린, 마침내는 완전히 얼어붙은 냄비를 붙들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전념하는 자가 바로 자기 신앙에 대하여 가장 열렬한 투사임을 입증하는 것이 됩니다. 요컨대 그들은 모두 자기 왕국의 안녕을 보존하거나 혹은 자기들의 배를 채우고자 하는 한 가지 목적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진지한 열성을 조금이라고 보여 주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3. 새로운 것과 불확실한 것 그리고 기적의 가치에 대한 적대자들의 힐난을 반박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의 교리를 끊임없이 공격하고, 증오와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험담으로 규탄하며 중상모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교리를 신기하고 최근에 생겨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이 교리가 무슨 이적으로 확증되었는가를 제시하라고 우겨대며, 많은 거룩한 교부들의 동의와 가장 오래된 관습에 반대되도록 그런 교리를 주장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그들은 묻고 있습니다. 이 교리가 교회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분리주의임을 스스로 인정하던가, 아니면 그런 교리를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여러 세기 동안에는 교회는 전적으로 죽어 있었다고 말하던가,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자백하라고 그들은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이 교리가 수많은 종파, 수많은 선동적인 폭동, 수많은 방종을 발생시킨 것으로 보아 그것이 어떠한 것임을 그 열매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변론이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경신하는 무리들, 무지한 무리들 앞에서 우리의 버림받은 주장을 모욕하기란 매우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역시 말할 수 있는 기회만 허락되었다면, 제멋대로 맹렬하게 퍼붓고 있는 그들의 이 가혹한 비난은 아마 점점 힘이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첫째, 그들은 이 교리를 "신기"하다 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해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은 결코 신기하다는 말로 칭찬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실로 이들이 이 교리를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데 대하여 나는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복음이 그들에게 신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느니라"고 한 바울의 설교가 옛날부터 있었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주장하는 말에서 신기하다는 점을 하나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이것이 오랫동안 파묻혀져서 알려지지 못한 것은 인간의 불경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회복되었으니 적어도 그 옛 주장은 진리로 받아들여져야 할 줄 압니다. 이상과 같은 무지로 그들은 이 교리를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주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 만은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탄식하신 그대로 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 교리가 불확실하다고 비웃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피와 생명으로 그들 자신의 교리를 확증해야 했다면, 그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값진 의미를 가지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확신은 이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어서 죽음의 공포도, 심지어는 하나님의 심판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적을 요구하고 있으나, 그것은 올바르지 못한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슨 새로운 복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이미 행하신 이적을 통하여 진리로 확증하신 바로 그 복음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와는 다르게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이적을 통해 그들의 신앙을 확증할 수 있다는 이상한 특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장하는 이적이란, 원래는 잘 안정되었던 마음을 오히려 불안하게 만드는 것으로 그러한 것들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경박하며, 허망하고 거짓된 것들입니다. 비록 그 이적들이 신기한 것이었다고 해도, 하나님의 진리를 반대하는 데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들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성호는 언제 어디서든지 이적, 또는 자연의 일반적인 질서에 의해서 경외함을 받아야 하는 까닭입니다. 만일 이적의 정당한 목적과 그 효용을 성경이 가르쳐 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들의 이 헛된 생각들은 한층 더 과장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는, 사도의 설교 다음에 따르는 여러 가지 이적들은 그 설교를 확증하기 위해서 행해진 것이라고 말하였으며, 누가도 역시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와 똑같은 말씀을 다음과 같은 사도의 주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즉,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표적과 기사가 복음의 인장임을 알게 되었는데, 복음의 신앙을 파멸하도록 우리가 이것들을 악용할 수 있겠습니까?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만 예정되어 있는 이 표적과 기사들을 허위로 확증하는 데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서 기자의 말대로, 이적보다 우위인 이 교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검토되며 고찰되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인 줄로 압니다. 그것이 확증되면, 그 다음으로는 마땅히 이적에서 확증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건전한 교리의 표는 인간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교리의 시험을 확증하셨기 때문에, 이적이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것보다 어떤 다른 목적에 적용된다면 그것은 부당한 것입니다 사탄에게도 역시 이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능력이라기보다는 기만이기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들을 오도하기에는 충분한 것입니다 마술사들과 주술사들이 언제나 유명해진 것은 그들이 행한 기사 때문이었습니다. 우상 숭배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그들의 이적에 의하여 조장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마술사와 우상 숭배자들의 미신을 우리에게 신봉케 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옛날 도나투스파는 이 타격용 망치를 가지고 그들에게 이적을 행할 능력이 있듯이 단순한 대중들을 압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어거스틴이 도나투스파에게 한 것과 똑같은 답변을 우리도 역시 반대자들에게 하려고 합니다. 그 답변은 우리 주께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예언하시며 이적 행하는 자들을 경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도 적그리스도의 나라가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으로 임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이적들은 우상이나 마술사가 거짓 예언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도에 의해서 행해진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이 사탄의 계교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이 말하는 것입니다. 옛날 애굽 사람들은 애굽에 있는 예레미야의 무덤에 제물을 바치고 신적인 숭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거룩한 예언자를 우상 숭배의 목적으로 악용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그들은 그의 무덤을 이렇게 숭배한 대가로 뱀에게 물려도 나음을 얻게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시는 것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자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가장 공의로우신 형벌이라는 것 외에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적은 결코 없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확실하여 조롱거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위 반대자들이 말하는 이적은 다만 사탄의 유혹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를 버리고 허망한 데로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4. 교부들이 개혁 교리를 반대한다고 하는 부당한 주장 더욱이 그들은 우리가 교부들, 즉, 초대 교회의 보다 순수하던 시대의 저술가들을 반대한다고 중상모략하고 있습니다. 마치 교부들이 자신들의 불경건을 옹호하였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만일 논쟁이 교부들의 권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하면, 가장 겸손히 말한다 해도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이 교부들의 저작에는 많은 예들과 증거들과 탁월한 것들이 많이 있지만, 역시 어떤 점에 있어서는 인간이 공통적으로 범하게 되는 과오가 그들에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소위 이 경건한 자들은 그들의 재능과 판단력과 정신력을 총동원하여 교부들의 결함과 실책만을 존경하고, 교부들의 탁월한 저작은 무시(無視), 와전(訛傳), 왜곡해 버렸습니다. 황금 가운데서 불순한 찌꺼기를 수집하는 것이 곧 그들의 유일한 과제였다고 말하는 것이 아마 타당한 것인 줄로 압니다. 그런데 그들은 소름끼칠 정도로 법석대면서, 우리를 가리켜 교부들을 경멸, 또는 반대하는 자라고 하며 억누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부들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것이 나의 현재의 목적이라고 하면, 오늘날 우리가 주장하는 교리의 대부분을 교부들의 찬성을 얻어 입증한다 해도 조금도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부들의 저술을 연구하면서 거기에 다음과 같은 말이 인용된 것을 항상 기억하고 있습니다. 즉, "만물이 다 우리의 것"이로되, 이는 우리를 지배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봉사하기 위해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것"이며, "누구를 막론하고 당연히 그에게 순종할 의무가 있다"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구별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종교에 대하여 전혀 확신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인물들도 모르는 것이 많고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고 때로는 스스로 모순에 빠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네 선조의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고 한 솔로몬의 경고가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규칙은 전답)의 경계나 신앙의 순종에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순종은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라는 것에 기초를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풍유적인 해석을 그렇게 좋아한다면, 어째서 지계석을 옮겨서는 안 된다고 한 그 선조를, 어떤 다른 사람보다 사도들이라고 해석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바로 제롬의 해석이었는데, 그들은 제롬의 말을 교회 법전에 인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마음대로 선조들의 지계석을 그대로 보존하기를 원하였다면, 어째서 그들은 고의적으로 이것을 스스로 범하였겠습니까? 두 분의 교부가 있는데, 그 중 한 교부는 "우리 하나님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시기 때문에 잔도 접시도 필요 없으시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한 교부는 "거룩한 의식은 황금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황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황금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야말로 이 한계를 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룩한 의식을 올릴 때, 금, 은, 상아, 대리석, 보석, 비단을 사용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으며, 따라서 모든 것을 눈부시도록 찬란하게 꾸미고, 지나칠 정도로 사치스럽게 꾸미지 않으면,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서 "다른 사람들이 육식을 하지 않는 날에도 마음대로 고기를 먹는다"고 말한 교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순절에 고기를 먹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저주하였으니, 그들은 그 한계를 범하는 것입니다. 역시 두 분의 교부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분은 "자기 손으로 일하지 않는 수도사는 흉한이나 산적과 같이 취급되어야한다"고 하였으며, 또 다른 교부는 "수도사는 비록 연구와 명상과 기도에 몰두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여 생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게으르고 배가 나온 수도사들을 사창굴과 홍등가에 두어 남의 재산으로 포식하게 하였으니, 결국은 이 한계를 범하고야 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화상이나 성자들의 화상이 교회당 안에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무섭고 가증한 것들이라고 어떤 교부는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예배의 대상을 벽에 그려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단순한 한 개인의 선언이 아니고 교회 회의에서 결정한 교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이 한계의 제한을 받을 수 없었던지 교회 구석구석마다 화상들로 꽉 채워 놓았습니다. 또한 죽은 자에 대하여 인간의 예절을 다 갖추어 장례식을 치르고 난 후에는 그들을 편히 쉬도록 내버려두라고 어떤 교부는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한계를 무시하고 죽은 사람에 대하여 끊임없이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교부들 중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바 있습니다. 즉, "성찬시 떡과 포도주의 실체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실체와 인성이 신성에 연합하여 그대로 존속하는 것처럼 존속하게 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이 낭독될 때 떡과 포도주의 실체는 주의 몸과 피로 화한다고 공상을 할 때 그들은 이 한계를 범하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에 오직 한 개의 성찬만 있음을 제시하고, 사악하고 범죄한 사람들은 모두 참석하지 못하도록 금하였으며, 또한 성찬식에 참석은 하고도 떡과 포도주를 받지 않은 자들을 심히 책망한 교부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교부들의 한계를 멀리 떠나서, 교회당뿐만 아니라 사가에서까지도 미사를 행하였으며, 누구를 막론하고 이를 구경하도록 허락하였고, 아무리 불순하고 사악한 자라 하더라도 기부만 많이 하면 얼마든지 환영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초대하지 않았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성례전에 성실히 참여하도록 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목적하였던 의도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와 공로가 아니라, 자기네 행위를 내세우려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역시 두 분의 교부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교부는 "그리스도의 성찬에서 그 일부만을 택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다른 부분을 택하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금지시켜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교부는 "주님을 고백하기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도록 명령받은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주님의 피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한계도 저버리고, 전자가 파문의 형벌을 주었으며 후자가 정당한 이유로 부인한 그 사실을, 침범할 수 없는 법칙을 만들어 명령하였던 것입니다. 애매모호한 문제들을 결정할 때, 성경의 명백하고 확실한 증거에 따르지 않는 것은 경솔한 일이라고 주장한 교부가 그러나 그들은 이 한계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없는 많은 제도, 많은 교회 법전, 많은 교리적 결정들을 확립해 놓았습니다. 이단들 가운데서 몬타누스가 금식법을 처음 강요했다고 해서 이를 비난한 교부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역시 이 한계에서도 멀리 벗어나, 금식을 가장 엄격한 법으로 설정해 놓았던 것입니다.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결혼이 금지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오히려 아내와 함께 사는 것이 순결하다고 주장한 교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교부의 견해에 동의한 교부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한계를 벗어나서, 성직자들에게 가장 엄격한 독신 생활을 하도록 법을 제정하였습니다. 또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신 성경의 말씀대로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만을 들으며, 또한 우리 이전의 어떤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행위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만물의 시작이신 그리스도의 명령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 교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한계를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도 지키지 못하게 함으로써 결국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선생들을 자기들과 다른 사람들의 선생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어떤 교부는 "교회는 자신을 그리스도 위에 두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언제나 진실하게 심판하시지만, 교회의 심판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주 잘못을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한계를 무너뜨리고, 성경의 전 권위가 교회의 결정에 좌우된다고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주장합니다. 모든 교부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궤변가들의 교활한 행동으로 더렵혀졌고, 변증론 자들의 논쟁으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한결같이 몹시 싫어하였으며 이구동성으로 증오하였습니다. 그들은 평생 동안 끝없는 논쟁과 궤변보다도 더 사악한 이론으로 성경의 단순성을 혼란하게 하며 흐리게 하는 일을 일삼아 왔으니, 과연 그들이 이 한계 내에 그대로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만일 지금 교부들이 되살아나서 그들이 말하는 소위 사변적 신학이라고 하는 그 이론을 들었다고 하면, 아마 이 이상 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논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부들이 가장 순종하는 자손들로 간주되기를 원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뻔뻔스럽게 교부들의 멍에를 저버렸는가 하는 데 대해서 만일 내가 상세하게 열거하기를 원한다면, 아마 나의 논술은 그 적절한 범위를 훨씬 초과할 것입니다. 아마 몇 달, 아니 몇 해라도 내게는 부족하였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그처럼 비겁하고 부패할 정도로 무지한 자들이어서 오히려 그들은 우리가 그 옛날의 한계를 범하였다고 서슴지 않고 비난합니다. 5. 진리를 버리고 관습을 따름 그들은 "관습"이라는 것에 호소하지만 여기서는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관습에 굴복하게 만든다는 것은 우리를 가장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만약 인간의 판단이 옳다면 선한 사람들은 마땅히 이 관습을 추구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정은 이와 다른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많은 사람의 행동이 얼마 안 가서는 곧 관습이라는 세력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일이라는 것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다 좋은 것을 기뻐하는 것만큼 선한 상태로 되어진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대중이 가진 개개인의 비행에서 공적인 과오가 초래되고, 혹은 비행에 대한 공통적인 일치가 초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선한 사람들은 그것을 법으로 삼기를 원합니다.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지구상에 범람하고 있는 악의 대양이 하나가 아니며 많은 위험한 역병이 이 지구상에 퍼져 있다는 것, 그리고 만물이 멸망을 향해 급속으로 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 같이 인간사에 대하여는 체념하든지, 아니면 이 큰 악에 대하여 힘차게, 또는 맹렬하게 대항하든지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구제책은 이미 우리가 오랫동안 죄에 익숙해져 있다는 이유 때문에 거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는 공적인 오류가 지배적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의 영원한 진리만이 지배되고 준수됩니다. 그리고 이 진리는 세월의 연속도, 오랫동안의 관습도, 인간의 음모에 의해서도 지배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야는 하나님의 선민에게 "이 백성이 맹약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맹약한 자가 있다 하지 말며"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즉, 이 말은 하나님의 선민이 백성의 사악한 생각에 참여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다시 이사야는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원하는 대로 과거와 현재의 많은 예증을 들어 우리를 대항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만군의 주를 거룩한 분으로 모신다면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시대가 이와 같은 불경건한 행동에 동의한다 해도 삼, 사대까지 원수를 갚으시는 하나님은 강한 분이십니다 아무리 전 지구가 똑같은 불의에 가담한다 해도, 대중과 함께 범죄한 자들의 말로가 어떠한가를 하나님은 실례를 들어 가르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홍수로 전 인류를 멸망시키고, 한 개인의 신앙으로 전 세계를 정죄한 노아를, 그의 소수의 가족과 함께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요컨대 악한관습은 하나의 유행병과 같은 것이어서, 사람들이 대중과 함께 여기에 빠진다 해도, 망하는 데 있어서는 마찬가지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어디선가 키프리아누스가 한 말을 마땅히 고려해야 할 줄로 압니다. 즉, "무지로 범죄한 사람은 비록 전적으로 사함을 받을 수는 없으나, 어느 정도까지는 사함을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진리 완강히 거부하는 사람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6. 교회의 성격에 관한 그릇된 견해 그들은 교회가 얼마 동안 생명을 잃었다던가, 혹은 현재 우리가 교회와 싸우고 있다던가 둘 중의 하나를 인정하게 하여 우리를 괴롭히려고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확실히 살아 있으며, 그가 아버지의 오른 편에 앉아서 다스리고 있는 한, 교회는 앞으로도 계속 그 생명을 지속할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살아서 그리스도의 손에 의해 지속되며, 그의 보호하심으로 방어되며, 그의 능력으로 안전하게 보존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일단 약속하신 것은 틀림없이 이루시어, 자기 백성과 더불어 "세상 끝날까지"함께 계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를 대항하여 싸우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시대를 통하여, 경건한 성도들이 항상 그를 경배한 것처럼 우리가 한 마음으로 모든 그리스도인과 한 마음으로 한 분 하나님과 주 그리스도를 예배하며 숭배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적들은 현재 눈으로 볼 수 있는 교회만을 인정하고, 이것을 묶어 둘 수 없는 테두리 안에 제한시키려고 함으로써 진리에서 멀리 떠났습니다. 이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을 기초로 하여 논쟁의 방향을 바꾸려 합니다. 첫째 그들은 교회의 형체를 유형적이며 가시적이라고 주장합니다. 둘째로 그들은 그 형체를 로마 교회의 교황청과 교직 계급제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장은 이와는 반대로, 교회는 어떤 유형적인 형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형체는 그들이 어리석게 찬양하는 그런 외부적인 화려함에 내포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전혀 다른 표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한 전파와 성례의 합법적 시행입니다. 그들은 교회가 언제나 손가락으로 지적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못할 때에는 야단을 칩니다. 그러나 교회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흔적조차 볼 수 없을 만큼 자주 훼손되지 않았습니까? 엘리야가 자기 혼자 남은 것을 몹시 불평했을 때 교회는 어떠한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도 오랫동안 교회가 그 외부적인 형체를 갖추지 않고 지나왔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후 교회가 자주 전쟁과 폭동과 이단으로 말미암아 압박을 받아, 전혀 빛을 비추지 못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 당시에 살고 있었다면, 아마 어떠한 교회도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바알 신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가 7천 명이나 남아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지금까지 계속 전 세계를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당시의 경건한 성도들이 만일 눈에 보이는 형체를 요구하였다면, 그들은 낙담하지 않았을까요? 힐라리는 실로 민중들이 어리석게도 감독직의 위엄을 예찬하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 가면 밑에 도사리고 있는 무서운 해독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가장 큰 죄악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 일을 충고하겠습니다. 적그리스도를 경계하십시오. 그런데 여러분은 어리석게도 벽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교회를 집과 건물로 알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집과 건물 안에서 평안이라는 이름을 찾고 있습니다. 이것들 안에 마침내 적그리스도가 자리를 잡게 될 것이라는 것에 어떤 의심이라도 있습니까? 오히려 이것들 보다 산, 산림, 감옥, 호수, 그리고 깊은 구릉이 더 안전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은 이런 곳에 추방되어 살면서도 예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오늘날 세계의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 뿔난 관을 쓴 감독들을 존경하게 하였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큰 도시들을 통치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들을 종교의 신성한 고위 성직자라고 생각한 것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와 같은 어리석은 예찬을 깨끗이 물리치고, 오히려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이는 "자기 백성을 아신다"는 주님만이, 교회의 외형적인 표시를 인간적인 관점에서 제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불경건 때문에 초래된 심판이라면 어째서 하나님의 그 의로우신 복수를 대항하려 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은 지난날 인간의 배은망덕을 벌하셨던 것입니다. 즉, 자신이 주신 진리를 반항하며, 그 빛을 소멸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눈을 멀게 하여 어리석은 거짓말에 속게 하시고 깊은 어두움에 처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의 형태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함께 하나님은, 흑암과 오류 가운데 흩어져 숨어있는 자기 백성들을 멸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이 사실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은, 하나님은 바벨론의 혼란과 심각한 시련의 불꽃 속에서도 그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교회의 형체를 거짓된 허식에 의해 판단하려는 그들의 욕망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지적하려고 합니다. 나는 이에 대한 논의를 장황하게 끌지 않기 위해, 이를 상세히 논술하지 아니하고 개략적인 진술을 하는 정도로 마치려고 합니다. 사도직을 계승했다고 하는 교황과 이 교황에 의하여 기름부음을 받고 성별되었다고 하는 감독들, 이 사람들이 주교관과 홀장을 가지기만 하면, 이것으로 그들은 곧 교회를 대표하며, 그들 자신이 교회 자체로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잘못이 있을 수 없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교회의 목자이며 주님에 의해 성별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론과 이스라엘의 다른 지도자들은 목자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아론과 제사장으로 임명된 그 아들들도 금송아지를 만들어 범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논법에 따르면 아합 왕을 속인 사백명의 선지자들이 어찌하여 교회를 대표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교회는 실로 고독하고 멸시를 받았지만, 진리를 말한 미가야 편에 서있었던 것입니다. 그 선지자들은 교회의 이름과 외형을 보이며 연합하여 맹렬히 예레미야를 대적하고 위협하며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라고 자랑하지 않았습니까? 예레미야는 이 모든 선지자를 대항하여 홀로 파송을 받아, 율법이 제사장에게서, 모략이 지혜 있는 자에게서, 말씀이 예언자에게서 끊어지게 된다는 주의 말씀을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허식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모여서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모의하기 위해 모였던 그 회의에서 빛나지 아니하였습니까?이제 그들로 하여금 가서 그 외부적 가면을 쓰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모든 선지자를 분리주의자로 만들고 반대로 사탄의 사역자들을 성령의 기관으로 삼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그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말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나의 질문에 성실히 답하게 하여 주옵소서. 즉, 바젤 회의의 결정에 따라, 유게니우스는 배척을 받아 교황직에서 폐위되고, 아마데우스가 그를 대신하여 교황직에 오르게 된 후, 그들은 교회가 어떤 국민과 어떤 지역에 귀속되었다고 생각하였을까요? 그들이 아무리 극단으로 치우친다고 해도, 이 회의가 외면적인 형식에 관한 한, 합법적인 것이며, 따라서 한 사람의 교황에 의하여 소집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교황에 의하여 소집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유게니우스는 자기와 합세하여 이 회의의 해산을 시도하였던 모든 추기경과 감독들과 함께 분파), 반역, 완고라는 죄목으로 정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후 왕후들의 호의로 교황직을 완전히 회복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전체적이며 신성한 대회)에 의하여 합법적으로 결정된 아마데우스의 선거는 결국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다만 그 자신은 짖는 개에게 던져진 한 점의 편육처럼 추기경의 신분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후 이 반역적이며 완고한 이단자들로부터 교황, 추기경, 주교, 수도원장, 사제들이 속출하였습니다. 그들은 여기에 붙잡혀서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즉, 그들은 어느 편에 교회의 명칭을 부여해야 할까요? 이 회의가 외면적인 위엄에 있어서는 조금도 결함이 없는 회의였다는 사실, 그리고 교황의 두 교서에 의해서 엄숙하게 소집되고, 의장은 로마 교황의 사절에 의하여 성별 되었으며, 모든 사건이 질서 있게 처리되었고, 따라서 끝까지 그 위엄을 보존하였던 회의라는 사실을 그들은 부정할 것입니까? 그들은 유게니우스와 그의 모든 지지자(그들은 모두가 이 지지자들에 의하여 성별되었다)를 분리주의자로 인정할까요? 그러면 그들로 하여금 교회의 형체를 다른 말로 정의하게 하든지, 아니면 그들의 수가 비록 많다고 하더라도, 고의적으로나 자발적으로 이단자들에게서 임직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분리주의자로 간주하든지, 둘 중 어느 하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가 외적인 허식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비록 이전에는 찾아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들 자신이 이 허식에 대한 풍부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교회라는 미명 아래 방자하게 그들 자신을 온 세계에 과시했으니, 그들이야말로 교회의 치명적인 해독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그들의 도덕 생활이나 그들의 생활에 가득한 그 비극적인 악행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그 말은 들어야 하나 행위는 모방해서는 안 될 바리새인이라고 자처하는 까닭입니다. 만일 폐하께서 조금만 여가를 내어 우리의 저작을 읽으신다면, 그들이 교회라고 하는 교리가 영혼의 치명적인 해독이며, 교회 반대의 선동자이며, 또한 교회의 파괴자라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7. 개혁 교리가 물의를 일으켰다는 주장 마지막으로 그들은 우리가 교리를 가르칠 때는 많은 소요와 폭동과 논쟁이 일어난다는 것, 또는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미친 영향이 어떠하다고 불쾌하게 되풀이하여, 참으로 솔직하지 못한 행동을 행하고 있습니다. 실로 사탄의 악의에 돌려져야 할 죄악의 책임이 부당하게 우리가 가르치는 교리에 돌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사탄이 편히 잠들고 있을 때는 결코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대중의 환심을 받으며, 세상의 갈채를 받음으로써, 쉽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그 거짓된 교리와 구별되는 가장 확실하고 명백한 특징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이 깊은 암흑 속에 잠겨져 있던 몇 세기 동안, 거의 모든 사람은 세상 임금의 희롱과 우롱의 대상이 되었으며, 사탄은 사르다나팔루스처럼 안일과 향락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가 태평하며 평화스러운 왕국을 소유하는 동안, 우롱과 희롱을 일삼는 것 외에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위로부터 비취는 빛이 그의 흑암을 다소 약화시키고 "강한 자"가 와서 그의 나라를 어지럽히며 맹렬히 공격을 가하자 그는 비로소 자신의 평소의 게으름에서 깨어 무장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첫째로 그는 사람들을 선동하여 폭력을 행하게 함으로써 빛나기 시작하는 진리를 맹렬히 탄압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아무 효과도 거두지 못한 것을 알게 되자, 그는 교활한 계획을 꾸몄습니다. 즉, 그는 반세례주의 자들과 악한들을 통하여 논쟁과 교리상의 충돌을 일으켜, 이것으로 진리를 모호하게 하며, 마침내는 이를 멸절시키려 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현재 두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계속 공격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사람들의 폭력을 이용하여 이 진정한 씨앗을 뿌리째 뽑으며, 힘이 미치는 데까지 가라지를 뿌려 진리를 질식시키고 그래서 그것이 성장도 결실도 할 수 없도록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유의하기만 하면, 사탄의 이 모든 노력은 완전히 무효가 될 것입니다. 주께서는 벌써 오래 전에, 우리가 사탄의 포로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의 책략을 충분히 알려 주셨으며, 또한 그의 모든 계략에 대항할 수 있는 충분한 방어 무기로 무장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악한 자들과 반역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반항하여 일으킨 그 가증한 소동의 책임을, 그리고 협잡배들이 일으킨 그 종파심의 책임을,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돌리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악한 일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가 아니냐고 질문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소요죄로 몰아붙였습니다. 사도들은 백성을 선동하였다는 죄목으로 고소를 당한 일이 있습니다. 오늘날 모든 혼란, 소동, 논쟁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자들의 행동과 앞에서 말한 자들의 행동이 무엇이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고발에 대하여 어떻게 답변해야 할 것인지 엘리야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즉, 오류를 퍼뜨리고 소요를 일으키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에 대항하는 그들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답변만으로도 그들의 그 무모한 행동을 물리칠 수 있지만, 한편 그와 같은 중상모략에 자주 동요되어 마음의 불안과 혼란에 빠지는 자들의 약함 때문에,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는 줄로 압니다. 이제 그들이 이러한 동요와 혼란 속에서 비틀거리며 빠져들어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도들도 그 당시 오늘 우리가 당한 것과 똑같은 일들을 경험하였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고 쓴 글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빠졌다고 베드로는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는 말씀을 듣고, 즉시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신자는 "법아래 있지 아니하다"라는 말을 듣고 그들은 즉시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을 수 있다"라고 고함을 지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죄를 장려하는 자라고 비난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많은 거짓된 사도들은 슬며시 침입하여 바울이 세운 교회를 파괴하려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오히려 악의를 품고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파한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복음은 거의 진보를 나타내지 못하였습니다.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였고" 어떤 이들은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라는 말과 같이 되돌아간 자들도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영의 자유를 육의 방종으로 악용하였습니다). 형제라는 이름으로 교묘히 환심을 산 후 경건한 신자를 위험에 몰아넣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형제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사도들은 무엇을 하였겠습니까? 그들은 잠시나마 모르는 체 해야 하였겠습니까? 아니면 많은 논쟁의 온상이며, 많은 위험의 근원이며, 많은 치욕의 기회가 된 그 복음을 거절하고 피해야 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들의 마음은 그리스도께서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시며,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으셨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확신으로 무장하고 소동과 공격의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대담하게 진군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또한 이와 같은 생각으로 살아야 마땅한 줄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영원한 특성은 망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우리에게는 복음은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이며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바울이 증거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배은망덕하여 하나님의 이 특별한 축복을 더럽히지 않고, 구원의 유일한 확신을 그르치게 하여 파괴하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도 역시 이 사실을 분명히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8. 왕에게 원수들의 중상모략을 조심할 것을 권하고 자신들의 결백함을 변호함 그러나 폐하시여! 이제 나는 폐하께 진언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반대자들이 폐하를 깜짝 놀라게 하려는 그 근거 없는 비난 때문에 마음의 동요를 받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 새 복음(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반란의 기회를 제공해 주며, 범죄하고도 벌을 받지 않게 하는 그런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은 "죄를 짓게 하는 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가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추호도 의심을 받을 만한 혐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와 같은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우리가 왕국을 전복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과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직까지 한 번도 파당적인 말을 하였다고 들은 적이 없으며, 폐하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우리의 생활은 안정되고 검소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심지어는 현재의 망명 생활에서까지도 폐하의 안녕과 폐하의 나라의 번영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범죄하고도 벌을 면하려고 애쓴다는 말이 과연 있을 수 있는 말입니까? 우리의 도덕적 행동에 있어서 비록 여러 가지비난의 대상이 될 만한 것이 있을는지는 모르나, 그들이 말하는 그런 심한 비난을 받을 만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생활이 순결, 관용, 긍휼, 절제, 인애, 겸손 그 밖의 여러 덕행에 있어서 비방자들에게 모범이 되지 못할 만큼 복음의 유익을 얻은 것이 거의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성실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며,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성호를 거룩하게 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들 중 어떤 이들은 특별히 찬양해야 할 바로 그 일로 인해서 사형을 받았지만, 비방자들의 질투 그 자체가 그들이 무죄하다는 것과 공민으로서 청렴하다는 것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복음을 구실로 삼아 소동을 일으키거나(폐하의 나라에는 아직 한 번도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를 죄악의 구실로 삼는 자가 있다 하면(이런 사람들을 나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법률과 법률이 규정한 형벌이 있으니, 그들의 과실에 따라 그들은 엄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복음이 파렴치한 사람들의 악한 행동 때문에 모독을 당하지 않기를 원할 뿐입니다. 폐하시여! 비방자들의 중상에 대하여 너무 지나치게 경신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는 이미 그들의 유독한 불법 행위를 상세하게 폐하 앞에 제시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너무 상세하지 않았는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서문으로 거의 완벽한 변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의도하는 것은 이 서문에서 우리의 주장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탄원에 폐하께서 귀를 기울일 마음이 있도록 하려는 것뿐입니다. 폐하의 마음은 현재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 대하여 분노하고 계시지만, 그러나 폐하께 드리는 우리의 변호, 즉, 이 신앙 고백을 조용히 또는 침착하게 한 번 만이라도 읽어 주신다면, 우리는 다시 폐하의 호의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고발당한 자에게 변명할 기회가 없을 정도로, 악한 자들의 귓속말에만 폐하께서 귀를 기울이시게 된다면, 또는 무법하고 광포한 그들이 폐하의 묵인 하에 감금, 채찍, 고문, 참형, 화형 등으로 계속 박해를 가한다면), 우리는 실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극심한 곤경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내로 우리의 영혼을 얻을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기다릴 것입니다. 이 능력의 손은 때가 되면 곤궁한 자를 그 고난에서 구출하고 또 기고만장하여 날뛰며 우리를 멸시하는 자들을 벌하시기 위하여 무장하고 틀림없이 나타나실 것입니다. 지극히 훌륭하신 폐하시여! 만왕의 왕 주께서 폐하의 왕좌를 의(로 확립하시며, 폐하의 주권을 공평으로 견고하게 하시기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1536년 8월 1일 바젤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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