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 | 박철동 | 2014-07-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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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 루터의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에 대하여 (1) 어거스틴과 연관하여 그 배경 (2) 루터의 견해 (3) 현재의 로마가톨릭, 루터주의와 개혁주의에서의 간략한 평가로 기술하고자 한다. 1. 배경: 루터는 칭의론이 교회가 설 수도 있고, 넘어질 수도 있는 교리라고 불렀다. 루터의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칭의론이 그 중심에 있고 1522년 독일어 신약성경 번역시 롬3;28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부분에 원문에는 없지만 ‘언어의 성질뿐만 아니라 내용 자체가 강요한다고’ ‘오직’이란 단어를 넣기도 했다.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의 상태를 루터는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고 규정한 배경에는 어거스틴의 영향이 있기에 어거스틴의 이에 대한 견해를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상태를 나타내는 루터의 simul justus et peccator는 어거스틴에게 거의 같은 어구구조로 나타나지만 그 의미는 다르다. 루터와의 공통점은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의는 죄들의 용서에 달려있다는 점이다. 루터는 이런 점에서 ‘죄 사함은 그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전가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어거스틴의 말을 자주 인용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사랑은 신플라톤적 사고와 성경적 사고를 종합하여 창조주를 향한 사랑인 caritas와 타락한 인간이 피조물을 사랑하는 cupididtas로 구별된다. 믿음으로 주입된 하나님의 사랑 혹은 은혜를 입은 성도는 이전에 그의 삶이 cupididtas의 지배를 받아 원천적으로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caritas의 지배를 받아 원천적으로 의인이라는 관점이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의인이 동시에 죄인’이라는 견해는 비록 caritas가 지배적이어도, 현재의 삶에서는 caritas와 cupididtas와의 계속되는 싸움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도가 caritas로 특징지어진 부분은 용서가 필요하지 않지만, 여러 결점으로 실제로는 많은 죄를 짓는데 이러한 영역은 용서를 필요로 한다. 성도의 이러한 실제적인 부분적 의가 죄 용서에 의해 감싸져서 의로 간주된다는 관점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어거스틴의 중생한 인간의 상태는 ‘부분적으로 의인이고, 부분적으로 죄인(paritum, paritum)’이다. 이에 반해 루터의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의 관점은 ‘동시성’에 실제적 의미를 부여하여 죄와 은혜를 적당히 섞지 않고, 둘이 다른 단계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실제적으로 성도는 완전한 의인이며, 동시에 완전한 죄인이라는 관점이다. 2. 루터의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의 견해 루터의 이 어구에 대한 관점은 그의 초기와 후기의 견해가 다르고, 특히 의롭게 된 성도가 실제로 의로워지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를 그의 저작에서 동시에 발견된다. 따라서 본 내용은 현재의 루터파 신학자들의 견해를 따랐다. 루터는 이 어구를 “로마서강해”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4:7(불법이 사하심을 받고 ...)의 주해를 통해 인간이 외적으로 의로운 것은 단지 하나님의 전가에 의한 것이기에, 내적으로 그리고 우리들 자신들로서는 항상 죄인임을 강조한다. 여기서 루터는 죄인과 의인인 것이 모두 전적인 것을 말한다. 7;18(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 주해에서는 죄인과 의인의 동시성을 강조한다. 동시성에서 의인됨과 죄인됨은 섞여서는 안 되는데 섞이면 어거스틴의 견해와 같이 ‘부분적으로 죄인이고 부분적으로 의인’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둘을 나누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나누게 되면,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이 이제 실제로 의롭게 되는(becoming) 과정 중에 들어가는 칭의는 지나가고 성화의 단계로 나아간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1) 루터의 동시성 이해(섞지 않는다): 루터는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가 부분적으로 의롭다거나 부분적으로 죄인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의인이고, 전적으로 죄인이라고 말한다. 모순처럼 보이는 이 말에서 루터는 인간이 의롭다함을 받을 때 죄 사함을 받고, 그 후에는 전가된 의를 발판으로 자기의 의를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과거의 삶뿐만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도 죄의 용서를 의지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또한 완전히 의로운데 그것은 믿음 안에서 받아들인 ‘낯 설은 의’인 그리스도의 의가 완전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루터에게는 의롭게 된 사람이 죄 용서를 구하는 것은 아직 남아있는 죄의 ‘잔재’가 아닌 항상 그의 존재 전체에 대해서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설 때만 그리스도가 그의 의가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죄 용서 안에서만 그리스도는 항상 우리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루터는 여기서 의인됨과 죄인됨의 동시성을 강조한다. 인간은 의롭다함을 받아도 하나님 앞에는 심판과 죄 용서의 측면으로만 선다고 말한다. 죄는 일반적인 의미를 넘어서 루터에게는 어떤 선을 행하는 것도 포함되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는 것도 포함된다. 어떤 선을 인간이 행해도 완전 죄인인 인간의 어떤 죄의 요소들이 포함되기 때문이라고 루터는 말한다. 멜랑흐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담대하게 죄를 지어라”는 말로 많은 논란을 일으킨 것도 같은 견해에서 나온 것이다. 루터의 생각은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서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될 때, 그는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어떤 부분을 가졌기에 이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떠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2) 죄와 은혜는 두 단계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루터는 로마서 7장 앞부분 강해에서 의롭게 된 사람에게 죄가 제거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죄로부터 제거된다고 말한다. 루터는 의는 우리 안에 있지 않고 우리 밖에 하나님의 은혜에만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을 때 그 믿음이 아무리 불완전하여도 하나님은 완전한 의로 간주해 주신다고 말한다. 또한 의롭게 된 사람이 여전히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불신자를 죄인이라고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그 차이는 죄가 제거 되었느냐가 아닌 용서를 받은 죄인가에 있다고 말한다. (3) 동시성은 진보로서의 성화관을 배격한다: 루터는 성화가 죄로부터 의로 전진한다는 견해를 배격한다.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교제는 의롭다함을 받은 이후를 포함하여 항상 죄에 기초한다. 오직 죄인만이 의롭다함을 받기 때문이며,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능동적 사랑과 은혜에 기초하는 것과 다른 하나님과의 교제란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의롭게 된 성도는 동시에 죄인이라고 말한다. 그 자신은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의롭게 되고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말한다. (4) 동시성은 ‘옛 사람’ 과 ‘새 사람’ 의 동시성이다: 죄인됨과 의인됨의 동시성은 옛 사람과 새 사람의 동시성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도덕적 향상과 전진을 추구하는 성화관은 인간의 변화를 전제로 하지만 그러나 옛사람으로서의 인간은 본질적으로 변화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한다. 루터는 초기에는 어거스틴의 영향이 매우 강해서 성화를 연속적인 진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거룩한 삶의 모습을 상세하고 꼼꼼히 알아보는 것에 대해 분명한 혐오감을 보였다. 전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렵다고 말한다. 옛사람의 거룩함과 완전함 안에서의 성장과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고 말한다. 『소교리 문답서』에서 말하듯이, 옛 사람은 치유될 수 없고 죽어야 한다. 옛 사람은, 매일 죽임을 당해야 하고 새 사람이 일어나야한다. 어떤 종류의 치료도 옛 사람을 새 사람으로 만들 수 없다 옛 사람은 끝까지 옛 사람으로 남아있다. 새 사람은 그리스도의 낯 설은 의로서만 우리 안에 산다. 이 의는 내 인격의 일부분으로 결코 바뀌지 않는다. 우리 안에 있는 새 사람은 그리스도자신이시다. 그러나 이 현재의 삶의 상황들 아래에서 그리스도는, 옛 사람이 매일 매일의 죽음을 통과하는 것이 불필요할 정도로 우리를 전적으로 지배하시지 않는다고 말한다. 크리스찬의 실존은 이중적 측면으로 특정 지워져 있는데, 곧 그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다. 크리스찬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고 죄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서 그는 옛 사람이며 죄의 능력아래 있다. 크리스찬의 계속되는 죄성은 죄의 지배에 어쩔 도리 없이 굴복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로마서 7장의 생각을 표현한다. 곧 사람 안에는 “아무 것도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옛 것과 새 것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 속에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고 말한다. (5) 율법에 대한 기능: 의인인 동시에 죄인인 것을 아는 것은 율법주의를 방지한다고 루터는 말한다. 사람이 스스로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경우 율법을 통한 의로움을 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을 통한 의로움을 추구한다는 것은 아직 율법에 대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를 붙잡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또한 율법폐기론을 배척한다. 율법은 인간을 의롭게 만들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죄인인 인간을 정죄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계명들은 오직 죄인들에게만 필요하다. 그러나 자신의 육체 때문에 의인들도 죄인들이다. 결과적으로 계명들은 필요한데, 이는 우리가 그것들이 명하는 행위들을 행함으로써 의롭게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의롭게 된 이들로서 어떻게 우리의 영이 육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우리를 이 세상의 상황들 가운데에서 이끌 수 있을 것인가를 우리가 알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6) 동시성과 기독론과의 관계: 루터는 크리스찬의 동시성을 다루면서 그리스도의 동시성 즉 “속성들의 교류”를 연결시킨다. 그리스도가 완전한 인간이면서 완전한 신(神)이셨던 것럼, 크리스찬도 완전한 죄인이면서 의인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리스도의 성질이 전적인 것처럼, 크리스찬의 동시성도 전적이다.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의인이시면서 인간을 위해 죄인이 되셨던 것처럼, 크리스찬은 철저히 죄인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자기의 것으로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상태는 의롭다함을 받은 이후에도 동일하다고 말한다. 3. 종합적인 평가 오늘날의 루터교 신학자들은 대체로 두 가지 측면에서 루터의 의인인 동시에 죄인에 대한 견해를 높이 평가한다. 첫 번째는 동시성은 ‘오직 믿음’을 확정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실 때 우리를 동시에 죄인으로 만드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인하여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의롭다고 선언함으로서, 동시에 우리의 죄와 불신앙의 정체를 드러내신다. 칭의의 무조건적인 행위는 인간의 참 모습을 노출시킨다. 칭의의 행위는 도덕적, 율법적 체계에서처럼 죄를 제거하지 않고 그것의 정체를 드러낸다. 따라서 인간은 가만히 있으면서 하나님의 심판에 귀기울여야한다. 이렇듯 죄인됨과 의인됨은 둘다 전적인 결정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드러내시려는 죄는 단순히 ‘도덕적인’ 죄에 대해서가 아니라 ‘영적인’ 죄, 우리의 ‘본질적인 자기의’라고 말한다. 이 모든 과정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두 번째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은 진정으로 동시에 죽어있으면서 살아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칭의가 ‘단지’ 법정적인지 아니면 ‘효과적’이기도 한지에 대한 오래된 논쟁이 극복된다고 주장한다. 의롭다고 하는 하나님의 선언을 통해 옛 사람은 이미 죽었다. 무조건적인 칭의의 선언이 옛 사람을 전적으로 죽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의인(절대적인 법정적 성격)이 그것을 효과적이 되게 하기 때문 칭의는 실제로 죽이고 또한 살게 하는 것이므로 극히 ‘효과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의인은 법정적이지만, 그것이 더 법정적일수록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현대 가톨릭의 입장은 Karl Rahner에게서 잘 읽을 수 있다. 그는 종교개혁의 동시성 어구에 대해 반대한다. 하나님의 행위로 이해되는 의인은 인간을 그의 존재의 가장 깊은 뿌리까지 변화시킨다. 의인에 의해, 진실로 그는 죄인이었던 인간으로부터 의로워진 인간이 되는데,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죄인됨을 중지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라너는 어떤 의미에서는 동시성 어구에 대해 찬성할 수 있다고 밝힌다. 물론 가톨릭적으로 이해해서 그렇다. 첫 번째로는 구원의 불확실성의 측면에서 그렇다 한다. 두 번째로 라너는 ‘경한 죄들’로 인한 인간의 죄성에서 찾는다. 일반적으로 가톨릭교도들은 자신이 의롭게 되었지만 경한 죄들을 계속해서 범하기 때문에 죄인으로서 항상 계속해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로 달려가야 한다고 말한다. 세 번째로 라너는 순례자로서의 인간의 모습이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점을 든다. 1999년에 있었던 루터교세계연맹과 바티칸 사이의 “칭의론에 관한 공동선언”은 실제적으로는 서로의 입장 차이를 확인하면서 서로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합의로 볼 수 있는데, 성도의 상태를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언급을 루터교회에서만 언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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