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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의 참된 은혜(구원 얻는 신앙)를 가졌는지에 대한 설교
박철동 2014.6.29 조회 1488

 

에드워즈의 참된 은혜(구원 얻는 신앙)를 가졌는지에 대한 설교 중(종교적 정서 논문 포함) 거의 후반기 설교인 마귀들의 경험들과 구별되는 진정한 은혜(True Grace Distinguished from the Experience of Devils)” 설교에서 매우 풍부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점거하거나 확증하게 해 주는 것 같습니다. 다만 종교적 경험을 다루기에 표현방식은 성도들에 따라 다를 수 있고, 당시의 배경과 경험을 분석할 때 로크의 인간오성론의 체계를 다소 따른 면은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설교를 20세기 말에 참된 그리스도인지를 아는 방법(How to know if you are a real Christian)”로 제목을 바꾸어 현대영어로 재편집하여 널리 알려졌지만 원 설교문에서 너무 많이 벗어나 편집되었습니다.(첨부파일 #02) 에드워즈의 회심에 관한 설교들을 번역하면서 제가 원본설교를 번역했는데 많이 미숙합니다.(첨부파일 #01)

 

함께 첨부한 12세기의 버나드와 에드워즈의 회심비교 소논문은, 다른 것은 제 견해대로 작성하여 참조하실 것이 없을 것 같은데 에드워즈의 회심에 관한 1차자료를 분석한 3장과 관련된 4장 부분은 회심에 대한 설교를 읽으시기 전에 참조하시면 좋을 것 같아 첨부했습니다.(첨부파일 #03)

 

PS. 19세기에 처음 출판된 에드워즈 전집(1권은 논문, 자서전, 각종 글들, 2권은 설교들) 2권에서 “by grace”가 원본입니다. 전집 두권 전체를 보기를 원하셔서 댓글을 남기시면 메일 보내 드리겠습니다.

 

 

마귀들의 경험들과 구별되는 진정한 은혜

(True Grace Distinguished from the Experience of Devils)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19).

 

 

본문말씀에 대한 관찰

 

1. 어떤 사람들은 이해를 통한 믿음이나 종교적 교리에 대한 신앙 등과 같은 것들이 하나님의 호의(好意)의 대상이 된 증거들로 의존합니다. 또는 이러한 것들이 그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나, 자신들의 신앙에 대한 좋은 평가의 증거로서 의존합니다. 본문말씀에서 한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교리는 특별하게 언급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아마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것으로, 이 교리는 특별히 그리스도인들과 이교도들이 고백하는 것 중에 분명하고 뚜렷한 구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백은 그들에게 권면된 것으로 사람들이 무엇을 의뢰해야 하는지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또는 최소한 위대한 영적이고 영원한 특권에 으로 을 갖게 되는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따라서 이 고백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구별되는 것으로 받아 들여졌습니다.

2. 야고보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믿는 것잘하는도다.”로 언급한 것을 볼 때 이것은 선한 믿음의 열매로서 이러한 믿음이 얼마나 많이 인정되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교리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교리들 중 하나로서 선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다른 모든 근본적인 교리들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이것은 구원을 위한 믿음을 갖는데 필수적인 내용입니다. 당시 사도가 쓴 글을 직접 받는 유익이 있었던 사람들에게 특별히 이러한 믿음이 없는 것은 큰 죄일 것이며 또한 얼마나 그들의 버림받은 상태를 훨씬 더 악화시키겠습니까? 이러한 믿음은 많은 점에서 선한 경향을 갖기에 또한 좋은 것입니다.

3. 그런데 본문말씀에서 구원의 상태에 있는 사람의 증거로서 이러한 믿음이 암시적으로 부인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정황은 이것이 본문에서 사도의 의도인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특별히 본문 결론 부분에 의해 보다 명백해 집니다.

4. 마귀들에게도 이러한 믿음을 가진 것이 발견되는 것에서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믿는 것에 대한 믿음이 은혜의 상태에 있는 표지(sign)가 아님을 사도는 증명합니다. 마귀들도 하나님이 한분인 것과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죄를 미워하시고, 진리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장차 심판 날에 그들에게 임할 너무나 큰 비참함을 알기에 무서워 떤다고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경험, 신적인 것들에 대한 지식, 진리에 대한 믿음, 양심의 각성과 두려움들, 정죄에 대한 확신과 그들의 영원한 두려운 버림받음 속에서의 하나님의 공의, 그들의 구원에 대한 갈망들, 그리스도의 외적인 영광과 천상의 것들을 보는 그들의 시야(sight), 종교적인 것들의 커다란 중요성에 대한 그들의 감각, 다른 세계, 하나님의 놀라운 위대함과 두려운 주권에 대한 그들의 감각,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을 아는 것이 구원얻는 은혜와 무관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본 설교의 주제를 만들기 위해 본문말씀으로부터 추론한 교리인 하나님이 한분이심을 믿는 것에서 마귀들이 이것을 경험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본질이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면 이러한 믿음은 실제 구원하는 은혜(saving grace)에 대한 어떤 확실한 표지로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본문에 대한 관찰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마귀들 안에 있는 것 혹은 그들이 하는 것은 은혜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아닙니다. 그러나 마귀들은 하나님이 한분인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한분인 것에 대한 당신의 믿음은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을 확증하는 증거가 아닙니다.

 

이와 같은 사도의 관점이 분명하게 들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두세 가지 면에서 이 교리의 진리에 대해 보다 폭 넓은 의미들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 마귀들은 어떤 차원에서도 거룩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마귀들은 하나님이 한분이심을 믿는 것에 대한 믿음 외에는 그 이상의 아무 것도 갖지 않았기에 그들의 이러한 믿음은 거룩한 경험들이 될 수 없습니다.

마귀는 한때는 거룩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타락했을 때, 모든 거룩함을 상실했고 완전하게 사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최고의 범죄자이며, 같은 의미로 모든 죄의 아비(father)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8:44),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요일 3:18). 특별히 마귀의 특성을 잘 반영한 말은 그를 악한 자라고 부르는 것에 있습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13:19),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13:38),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 2:13),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그래서 마귀들도 악한 영들, 불결한 영들, 어둠의 권세들, 이 세상의 어둠의 주관자들, 사악함 그 자체로 불립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6:12).

그러므로 확실히 마귀들의 마음에는 참된 거룩함의 본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종교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이나 이해는 신적이고 거룩한 빛의 본성이거나 그와 같은 성격이 전혀 될 수 없습니다. 마귀들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인상(impression)이 영적인 본성일 수 없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적인 것들에 대한 이러한 감각(sense)은 비록 위대하지만 거룩한 감각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러한 정서들은(affections) 비록 능력은 있지만 거룩한 정서들일 수는 없습니다. 만약 이들이 마귀 속에 있어도 마귀들 안에 거룩함이 없다면 이러한 것들이 사람 속에 있어도, 마귀들이 소유한 것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 그들 안에 더해지지 않는 한 사람들 속에 거룩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마귀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 더해진다면, 이것은 마귀들이 가진 마음과는 반대되는 특성을 갖습니다. 마귀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이러한 것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어떤 것이 없는 사람들이 갖는 그 어떤 것들도 거룩한 경험들이 될 수 없습니다. 마귀들이 지배를 받는 성향은 정서나 경험에서 거룩한 속성을 일어나게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부어진 초월적인 어떤 속성은 거룩함 자체를 일으키게 합니다.

만약 마귀들이 갖는 속성들과 경험들이 그들 안에 거룩함의 본성을 전혀 갖지 못했다면 이러한 것들을 가진 사람들이 비록 거룩하거나 은혜가 넘친다고 해서 그러한 것들이 참된 은혜의 확실한 표지일 수는 없습니다. 참되게 영적이고 은혜가 넘치는 것은 하나님 인(, seal)치심과 표지가 있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런 특성으로 이를 소유한 것들은 알려지게 됩니다. 그러나 거룩한 본성이 없는 것은 이러한 형상이 아닙니다. 확실한 은혜의 표지는 반드시 은혜의 본성(nature)과 본질(essence)을 갖는 어떤 것이나, 이러한 본질로부터 흘러나온 것, 혹은 그것에 속한 어떤 방식이거나 본질 자체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것과 구별되는 것은 본질이거나 이러한 본질에 속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때로 거룩함 혹은 은혜가 없이 발견되는 모든 것은 본질적인 것이나 확실함, 혹은 은혜의 구별되는 표지가 될 수 없습니다.

 

. 마귀들은 전혀 참된 거룩함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일반은총의 대상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들 마음속에 은혜와 거룩함의 본성(nature)과 본질(essence)을 갖지 않았음에도, 어떤 것들이 은혜 자체도 아님에도 은혜의 표지들로 생각된다면 확실한 은혜의 증거라는 속성(qualification)으로 간주하여 그것들을 따를 것입니다. 사람들이 갖는 이러한 것들은 아마 은혜와 유사한 것이거나 그것들이 은혜로 생각될 정도로 현저한 친근감(affinity)을 갖는 것들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마귀들 경우는 사람들과는 달리 어떤 참된 거룩함도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과 비슷한 어떤 지혜 또한 전혀 갖지 못한 은혜 자체와는 무한히 떨어져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일반은총은 가졌지만 구원하는 은혜에 대해서는 전적인 결여(destitute) 상태에 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거룩함은 갖지 않았음에도 윤리적 미덕(moral virtue)”이라고 불리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도 성령의 일반적인 영향의 사역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도덕률은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복음의 빛 안에 살게 하고 법적인 면에서 소경이나 완고함으로 포기하지 않게 합니다. 그래서 포기되는 것들이나 억제하는 은혜를 가진 사람들은 세상이 품을 수 없고 별 이유 없이 인류 사회에서 고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버림받고 마귀들처럼 지옥에 던져질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무엇에서든지 성령의 모든 자비로운 은혜와 그분의 억제하는 은혜를 전적으로 거두어 드리십니다. 그들은 성령의 구원하는 은혜는 물론이거니와 일반은총도 갖지 못합니다. 그 결과로 그들에게는 참된 거룩함이나 어떤 형태의 윤리적 미덕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존재라는 것을 그들 마음속에 악한 행동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 크게 증가하는 것이 나타내 줍니다. 여기서 이 세상에서 지옥에 갈 버림받은 사람들과 거듭나지 못하고 은혜를 입지 못한 사람들과 중요한 차이점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악한 사람들이 버림받은 사람들보다 좀 더 거룩함이나 진정한 미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세상을 떠날 때 어떤 사악함의 원리들(principles)이 주입되어 지옥에 던져지면 하나님은 성령의 모든 일반적인 자비들을 거두시고, 성령의 모든 억제하는 은혜와 선하신 섭리를 제거 하십니다.

. 사람의 존재가 어떤 면에서도 마귀와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귀는 사람과 같지 않고 오히려 반대되는 존재인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은 마귀의 속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참된 성도들은 비교되는 면과 실제적인 면 모두에서 마귀와 정반대이고 완전히 전적으로 다릅니다. 이들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마귀는 최고의(grand) 반역자입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대적자이며, 하나님께 정죄 받은 대상 중 가장 큰 진노의 대상입니다. 마귀는 영원히 하나님에게서 내쫒긴 전적으로 버림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 정죄 받아 영원히 지옥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성도들은 새 예루살렘인 천국의 시민들이며, 영광스로운 하나님 나라의 가족의 일원들이며,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인 그리스도의 형제이면서 신부이며 공동 상속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왕들이며 제사장들입니다. 또한 그들은 실제적으로도 마귀와 전적으로 다릅니다. 마귀는 증오에 찬 본성이 그를 지배하며 사단, 대적자, 지옥(Abaddon)과 무저갱의 사자(Apollyon), 가장 큰 파괴자, 우는 사자, 늑대, 거대한 용, 옛 뱀으로 불립니다. 반면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들,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 세상에서 탁월하고 온유한 자들, 어린양들과 비둘기들, 그리스도의 어린 자녀, 천국을 소유한 자들, 마음이 순결한 자들, 하늘의 별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들로 표현됩니다. 성도들은 빛이 어둠과 다른 것 훨씬 이상으로 마귀와 정반대이고, 천국과 지옥이 다른 것에 상응하는 성도들이 부여받은 영원한 상태는 마귀와 다릅니다.

지금 사람이 사단과 같다거나, 사단의 어떤 속성들, 자질들, 정서들, 행동들과 어떤 공통점을 가진다는 생각은 불합리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단을 초과하는 다른 점이 있는 것은 확실한 증거를 갖습니다. 성경은 악한 사람들을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람의 존재가 마귀와 어떤 면에서 마귀와 같은지를 고려하지 안, 그들이 마귀의 자녀가 아니고 영원히 거룩하고 복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것이 확실한 표지가 될 수 있다면 합리적입니까? 우리는 악한 자들이 장차 마귀들과 같은 속성들을 가질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예비 된 영원히 타는 불에 함께 들어갈 것입니다. 이제, 어떤 면들이 마귀와 같이 되는 사람의 존재가 마귀와 같은 속성을 가지지 않을 것이며 영광스러운 천사들과 그리스도와 함께 그와 함께 거하며, 그의 영광의 참여자인 것의 분명한 증표일 수 있겠습니까?

 

중요성

 

첫 번째 용도는 우리의 논지를 위해서 몇 가지 추론들이 놓여 있습니다.

.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러 가지 비슷한 점(유추)에 의해 버림받은 사람들이 행하는 것이나 언젠가 경험하게 될 어떤 것도 은혜의 확실한 표지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마귀들과 같은 버림받은 사람들은 본성과 상태(state)대로 순응합니다. 그들 안에는 마귀들보다 더 나은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더 높은 원리들이 없고, 더 탁월한 행동도 경험도 없습니다. 마치 그들은 마귀의 자녀와 종들이며, 그와 같은 비참함의 동역자로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도들의 미래상태를 마태복음 22:30에서 부활 때에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말씀하신 것에서 불경건한 자들의 미래상태는 지옥에 있는 타락한 악한 천사들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귀들의 측면에서 이 교리의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 앞에서 언급된 이유들 각각은 버림받은 사람들 측면에서는 정당합니다. 버림받은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거룩함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가진 속성을 넘어서는 아무 것도 없는 그러한 것들은 거룩한 경험들일 수 없습니다, 버림받은 사람들은 모든 참된 거룩함을 절대적으로 결여했을 뿐만 아니라 일반은총조차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의 존재가 어떤 측면에서 지옥에 있는 버림받은 사람들과 같은 것으로 그 사람들이 버림받은 사람들과 반대 되거나 같지 않고 장차 그들과 같은 존재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실한 표지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합니다.

 

. 우리는 더 나아가 종교적인 것들에 대한 마귀의 지식이 구원하는 은혜의 확실한 표지가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귀는 타락 전에 빛나고 영광스러운 하늘의 천사들 중에 있었으며, 능력과 지혜에 있어서 뛰어난 존재이기에 아침의 별들(morning-stars) 혹은 불의 화염들로 표현되었습니다. 비록 지금 죄를 범했지만 그의 죄는 천사적 본성이 가진 기능들을 제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타락했음에도 인간 본성의 기능들을 잃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죄는 영적인 원리들을 파괴하지만 자연적 기능들을 파괴하지는 않습니다. 죄의 완전한 지배를 받을 때, 죄는 거룩함과 영적 이해에 있어서 자연적 기능들의 작동을 전적으로 방해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죄는 일반적인 영역에서 자연적 기능들이 적절하게 행하는 것에도 많은 장애물들로 방해 합니다. 죄는 많고 강력한 편견으로 인하여 크게 불리한 처지에서 이성의 자연적 기능을 작동시킵니다. 또한 타락한 사람들은 죄의 결과로 영혼이 견고하게 결합되어 있는 육체적 기관의 커다란 약함과 무질서뿐만 아니라 영혼의 기능들도 커다란 방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기능을 파괴하거나 적합하게 말하는 것조차 감소시키는 경향을 가진 죄나 도덕적 부패의 본질 속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죄가 필연적으로 그 경향성과 능력을 가진 그러한 본질이라면 악한 사람들의 미래의 상태는 그들이 부패와 정욕을 아무런 제한 없이 행하는데 전전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죄는 모든 측면에서 그들을 최고의 완전함으로 이끌 것입니다. 아울러 그들의 영혼의 능력을 거대하게 감소시킬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는데 이유가 없지만 반대로 악한 자들이 다른 세계로 들어갔을 때(최후의 심판 때-역자 주), 그들의 눈이 열려 그들의 능력들은 커다랗게 확장되고, 인간의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위대한 언급, 종교적인 것들, 신적 존재(하나님) 등에 대한 그들의 실제적인 지식 또한 거대하게 증가됩니다.

마귀들의 능력의 권능을 에베소서 6:12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마찬가지로 사단의 교활함을 창세기 3:1, 고후 11:3 그리고 사도행전 13:10 등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커다란 능력으로 이해력을 가진 것처럼, 악한 사람들도 하나님에 관한 것들, 보이지 않고 영원한 세계, 다른 것들도 물론이거니와 이러한 것들에 대한 커다란 마귀와 같은 지식을 갖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마귀의 관점에서는 항상 중요하기 때문에 그들이 갖는 이러한 커다란 이해는 필수적입니다. 마귀가 처음 상태에서는 이러한 신적인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그의 주된 마음의 경향이기도 했습니다. 타락 전에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지속적으로 대하는 천사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타락으로 인한 죄는 마귀의 기억 속에 있는 신적인 것들에 대한 지식을 파괴하지는 않았기에 마귀는 이러한 지식들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교활함이 그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듯이, 종교적인 것들, 초월적인 교활한 표현들이나 암시(insinuation), 이성들, 그리고 시험들, 이러한 것들에 대한 언급 등의 측면에서 그의 교활한 처신은 근본적으로 원리적이기에 이러한 면들은 그의 교활함이 행해지고 명백히 드러나는 방식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귀가 신적인 것들에 관하여 그가 위대한 실제적 이해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합니다. 마귀는 어떤 학문이든 교활한 논쟁자가 되어 그 분야를 단지 혼란시키고 속이기 위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지만 마귀는 그러한 분야에도 정통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경우에도 해당 학문에 대한 거대하고 폭 넓은 지식을 가지는 것이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의심의 여지없이 마귀는 하늘들의 하늘과 같은 전 우주 안에서 최고의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볼 수 있기에 그가 가진 신적인 것들에 대해 마귀의 지식은 위대한 수준입니다. 마귀에게는 현재 인간이 땅의 벌레 같은 존재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에 관한 폭 넓고 정확한 지식을 갖는 것이 필요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는 특별히 보이는 세계인 창조의 관찰자로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사역들에 대한 보다 폭 넓은 지식을 가졌음이 틀림없습니다. 마귀는 욥기 38:4-7에서 말하는 새벽 별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마귀는 또한 하나님의 섭리의 사역에 대한 위대한 지식을 가졌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태초로부터 이러한 사역의 관찰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모든 세대를 어떻게 통치하시는지 보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시대마다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연속저인 섭리의 보살핌의 전 과정을 보고 있습니다. 마귀는 무관심한 관찰자가 아닙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보살핌 전 과정에서 마귀는 하나님에 대한 대적자로 필연적으로 그의 주의를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최고의 직접적인 관찰로 돌렸습니다. 마귀는 인간을 위한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본성, 구속의 사역방법, 이러한 구원계획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에 대해 폭 넓은 지식을 가졌음에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에 마귀는 하나님에 대한 주요한 대적자를 자초했습니다. 마귀는 구속사역에 대한 신적인 지혜에 보다 많은 주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엄청난 실망과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해 보았고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구속사역에서 행해지는 신적 지혜는 그의 계략들을 혼란에 빠트렸고 좌절시켰습니다. 마귀는 이 세상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에 대한 위대한 지식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한 때 하늘나라에 있었기에 하늘나라에 대한 위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지옥과 그곳의 비참함에 대한 본질에 대한 위대한 지식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지옥에 있는 자 중 가장 처음으로 그곳에 갔고, 고통을 경험했고 57만년 이상으로 그러한 고통을 지속적으로 느꼈습니다. 그는 우리의 구세주를 성경을 통해 시험했던 것을 볼 때 성경에 무엇이 쓰였는지를 아는 것을 방해받지 않고 거룩한 성경에 대한 위대한 지식을 가졌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성경을 최고로 정확하게 아는 것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왜곡하고, 악용하여 보다 큰 효력을 발휘하여 마치 하나님의 왕국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인간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방해하기 위함입니다. 마귀는 인간의 본성, 능력, 성향, 그들의 마음의 부패 등에 대한 위대한 지식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오랬 동안 인간에 대해 세밀하게 관찰하고 경험해 왔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태초로부터 그의 교활한 계획안에서 마귀의 강력한 능력들과 쉼 없고 지속적인 노력이 이루어지는 주요한 장소입니다. 그는 또한 경험적인 종교의 본질에 대한 위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의 존재가 교활하게 그것을 모방하거나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변형시킬 수 있는 것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언급을 통해 종교에 대한 마귀의 지식이 참된 경건에 대한 확실한 표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속성들,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 두 언약들의 본질, 경륜적 삼위일체, 구속사역에서의 삼위의 각각의 역할 등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하고 언급하는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만약 그가 그리스도의 직함들, 그에 의한 구원의 방법, 신적 지혜의 경이로운 수단들, 구속사역에서의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들에 대한 조화 등에 대한 너무나 탁월함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면, 만약에 그가 죄인의 칭의의 방법, 회심의 본질, 그리스도의 구속을 적용하는 성령의 작용들, 선한 구별을 주는 것, 어려움들이 행복하게 해결되는 것, 대상들에 답하는 것, 이러한 수단으로 교회 교육에서 무지가 위대하게 밝아지는 것, 반론에 대한 확신, 세상에서의 빛의 위대한 증가, 등에 대해 아주 명확하고, 정확하게 결코 말하지 않는다면, 만약 그가 원래의 교육과 가장 신적인 수백만의 참된 성도들 보다 더 이러한 측면의 지식을 갖지 못했다면 그가 가진 모든 것이 그의 마음속에 있는 구원하는 은혜의 어떤 차원에서도 확실한 표지가 되지 못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참된 성도들이 가진 신적인 것들에 대한 지식이 어떤 측면에서 특별한지를 말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11:27),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3:8).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지식이 마귀들이 그렇게 풍성하게 알고 있었던 마귀의 지식과는 다른 종류의 지식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신적인 것들에 대한 영적인 구원하는 지식은 보다 넓게 마귀 지식을 촉진(促進, promote)시키는 방향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마음이 구원하는 구별되는 지식에 대하여 많은 보조자료들을 포함하여 이러한 종류의 지식들에 더욱 깊은 관심과 연구를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교리적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참된 성도들이 갖는 구별되는 특성들이 없는 사람들과는 달리 참된 영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표현방식은 다소 다를 수 있지만 본질적인 측면은 너무나 많은 유사점을 갖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단지 종교적인 교리들을 진리라고 받아들이라고 마귀가 동의를 강요하기 때문에, 이러한 교리적 동의는 자신이 은혜의 상태에 있다는 확실한 표지가 되지 못합니다.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마귀들도 하나님이 한분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귀들도 일반적 의미에서 종교적 교리의 진실성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마귀들의 이러한 믿음은 교리의 참된 주제를 믿었기에 정통성을 갖습니다. 그는 이신론자나 소시이안, 알미니안, 펠라기우스주의자(Pelagion) 혹은 도덕폐기론자가 아닙니다. 그의 믿음의 성격은 전체적으로 건전하며, 그들 안에 이러한 것들이 전반적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기독교의 교리들을 믿는 것이 사색에 의해서만 깨달아진 것과 같이 단지 교리적 진술에 대한 강요로 이루어졌다면, 이러한 믿음은 은혜의 증거가 아닙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 종교적인 교리들의 진실성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갖는 것은 아마도 매우 드문 경우에 해당될 것입니다. 특별히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신비적인 면으로나 이성의 이해를 훨씬 넘어서는 측면에서 교리적 지식들을 소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와 그에 대한 교리들의 진리에 대한 참된 신뢰가 있고 이에 대한 증거를 강하게 주장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가 가진 확신은 마귀가 가진 확신을 넘어서는 어떠한 측면도 전혀 없습니다. 마귀도 의심의 여지없이 이성적인 확신들로서 위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마귀가 가진 지식은 자신이 가진 이러한 지식으로부터 기독교와 기독교의 몇 가지 교리들이 진리라는 것이 입증된 것을 인정하는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이 은혜의 확실한 증거라고 말할 때(요일 5:1),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말하듯이 이 믿음은 단순한 마귀와 같은 동의가 아닌 다른 종류와 방법으로서의 믿음인 하나님의 선택으로 인한 믿음인 것을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1:1). 참된 성도들이 특별히 가지는 마음 전체로서의 믿음은 진리에 대한 영적인 확신을 갖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저는 보다 특별하게 말하고자 합니다.

.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와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가지는 매우 큰 애통(哀慟)이나 공포심 등이 구원에 이르는 참된 회심의 확실한 표지가 아닙니다.

본문말씀 같이 마귀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장래의 자신들의 상태를 이해하며 커다란 공포심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말한 것뿐만 아니라 그 믿음의 결과로 떨었던것입니다. 마귀들과 같은 뛰어난 권력들과 능력들을 소유하고, 거만하고 교만하며 완고한 존재들이 떨었다.”는 것은 그들이 느낀 공포심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줍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구원을 생각할 때 많은 종류의 공포심들을 가집니다. 이러한 공포심은 진리에 대한 이해나 적합한 양심의 각성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그들의 상상에서 나온 우울한 측면이나 불쾌한 인상들로부터 올 수도 있고 혹은 어떤 근거 없는 이해, 사단의 미혹들이나 거짓된 제안들로부터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진정한 각성들이나 진리에 대한 확신들 그리고 그들의 현실에 대한 관점 등으로부터 나온 매우 크고 길게 지속되는 공포심들을 결코 갖지 못한다면, 마귀들이 가진 공포심과 차이가 없고 다른 세계(지옥)에서 모든 악한 자들이 갖게 될 공포심과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 어리석고 지각이 없는 대부분의 불경건한 사람들은 모두가 마침내 효과적으로 각성하게 될 것입니다. 지옥은 단지 잠자는 장소가 아닙니다. 지옥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장 엄숙한 경고들과 놀라운 위협들에 의해서도 각성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로부터 온 가장 놀라운 발견들과 가장 각성시키고 놀라운 섭리들 -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심판자로서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재림시 가지는 최종적인 안전한 승리의 나팔소리로 전반적으로 각성될 것입니다. 그때에 이러한 모든 유형들은 그들이 어떤 상태인지를 보면서, 진리에 대한 이해 가운데 가장 놀라운 공포심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성경은 그때를 이렇게 말합니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6:15-17). - 그러므로 사람들이 첫 번째로 각성되었고 후에 위로와 기쁨을 갖는다고 해서 그들이 갖는 위로들은 올바른 은혜의 증거라는 확실한 표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위로들은 매우 거대한 공포심이 선행되었기 때문입니다.

. 여기서 더 나아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율법의 역사가 없고, (믿음에 의한) 정죄의 확신과 형벌에 대한 단순한 모면이 그 사람이 자신이 구원에 이르는 회심을 했다는 확실한 주장으로 내놓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비록 자신이 이런 확신을 모든 영역으로 확대했다고 할지라도 어떤 확실한 증거로서 각성이나 공포심도 없고, 무엇에서도 법적인 사역도 없습니다. 은혜와 영적인 빛이 없는 마음이나 단지 자연적인 양심의 확신만이 있다면 이것은 자신의 구원에 관련하여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나오는 활동들과 행동들 모두가 -말하자면 이러한 빛에 대한 마음의 경향과 찬동이 없는 양심에 대한 선명한 빛에 의해 단지 강요된 마음의 상태를 -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혜나 그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회심을 했다는 확실한 표지라고 주장하는 것은 단지 논리적인 주장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면들은 마귀들도 가졌고, 마침내 멸망에 이를 모든 악한 자들도 같습니다. 자연적인 양심은 지옥에 있는 버림받은 자들에게도 소멸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양심은 가장 큰 능력 안에서 남아있고 그것의 가장 완전한 활동을 가져옵니다. (각성된 양심에 의해) 천지를 창조하신 왕에 대한 그러한 반역들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와 보복을 명백히 하고 이러한 수단들로 그들이 고통을 당하고 그들 안에 결코 죽지 않는 벌레가 있음을 압니다. 악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의 눈을 가리고 죄를 보복하시는 하나님의 이러한 대리인의 입을 막을 수단들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이런 일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른 세계에서는 양심의 눈과 입이 완전히 열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로부터 악한 사람들이 지금 열심히 그들의 눈을 감추려고 한 것들을 보고 알게 하실 것입니다.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오나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들을 사르리이다”(26:10-11). 우리는 하나님이 대적자들에 대한 진노의 위협에 종종 추가된 이러한 표현을 봅니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여호와인줄 알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은 그들이 화를 당하는 경험과 그들의 양심 안에 있는 선명한 빛 안에서 성취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멸시했던 그분의 권위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고 두려우신 분인지, 얼마나 거룩하시고 의로운 분이신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멸망이 하나님의 의롭고 거룩하신 처분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불경한 자들은 그들의 모든 악한 마음과 행동들에 빛이 비추어 그들의 모든 악함과 죄가 드러나는 심판의 날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온 세상에 드러나 다른 사람들도 볼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양심으로도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위협합니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50:21). 이 말씀을 시편 첫 네 절들과 비교해 보십시오. 심판의 날에 대한 계획은 무엇이 공의(公儀)인지 발견할 수 없습니다. 마치 그것은 단지 인간에 대한 심판만 언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행하시는 심판에서 인간 개개인의 양심과 온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가 알려지게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날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2:5). 현재 죄인들은 종종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특별히 그들을 정죄하고 그들이 핑계하는 죄에 대한 위협의 처벌에서의 하나님의 공의를 트집 잡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날의 빛으로 그들의 악함을 분명하게 드러내시고 이를 통해 그들을 판단하실 때 그들은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22:11-12). 하늘과 땅의 왕이 심판하러 오실 때, 그들의 양심은 너무나 완전하게 밝아져 그들 스스로를 위한 모든 변명도, 자신들을 정당화하거나 변명하려는 모든 간구가, 그들의 심판의 공의 앞에 할 말을 잊을 것입니다.

 

그때 그들의 양심만이 자신들을 정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언급한 바와 같이 죄에 대한 큰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은혜의 상태에 있다는 확실한 표지가 될 수 없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지금 분명하게 자신들의 생활 속에서 죄를 짓는데 더욱 악화 되어 갑니다. 더욱이 동시에 그것이 너무나 크기에 그들에게 공포심을 주고 여러 가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악한 자들이 그들의 마음속에 가졌던 거대한 광경, 불신앙의 죄에 대한 거대함, 그들의 가장 비밀스럽고 영적인 죄들에 대한 가증함과 아마도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의가 전적으로 부족한 것과 이로부터 하나님의 의에서 보내진 존재(그리스도)를 멸시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여지가 없고 버림받음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두려운 형벌을 내리신 것이 공의롭다는 것도 확신하고 있을 것입니다, 비록 이것이 너무나 두렵긴 하지만 이러한 모든 것들은 심판의 날에 불경건한 자들이 마귀들과 함께 왼쪽 편에 섰을 때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들과 함께 영원히 타는 불에 들어가는 정죄가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에게는 순종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양심이 자신들을 정죄하는 하나님이 공의롭다는 것을 확신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지는 하나님의 공의에 순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그들의 영혼이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적개심과 반발심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에 대한 마음(heart)과 의지의 진정한 순종은 참되게 회심한 자들 안에 있는 특별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들과 버림받은 영혼들이 가질 수 있는 단지 율법의 법적인 사역과 양심에 대한 확신들에서 결코 더 나아가 가질 수는 없는 것 있지만 위대하고 선명한 참된 회심한 성도들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어떤 구별되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율법의 현저한 역사와 양심에 대한 큰 확신들의 대상이 된 것은 단지 자신의 양심 안에서 심판의 날에 행해지는 것들을 미리 경험한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구름들에 있는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장차 하나님의 법정에서 피고석(bar)과 같은 곳으로 죄인들이 불려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움과 거룩하심, 죄를 미워하고 응보하시는 것과 그때 이를 행하시는 그분의 놀라운 장엄한 위대함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죄인들의 모든 불법들은 빛이 비출 때 그들 앞에 드러납니다. 그들의 죄들은 어둠속에서 감추었던 것들과 마음(heart)의 악한 의도들(counsels)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가운데 자신들 앞에 펼쳐지게 됩니다. 마지막 날에 이 일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심판의 날에, 양심의 확신들을 가졌던 죄인들에 대하여 많은 증거들이 반대해서 일어나고 악한 자들이 가졌던 것들을 반대하게 고소할 것입니다. 심판의 책들이 열려지고 특별히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거룩한 율법이 그들의 양심 안에 펼쳐지게 됩니다. 율법의 규정들이 죄인들의 정죄에 적용됩니다. 이 책은 심판의 날에 펼쳐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율법의 규정들 아래 살아왔던 악한 모든 사람들에게 율법은 그들을 정죄하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율법의 선고는 이미 현재에도 죄인들에게 공포되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선고가 공의로운 것은 명백합니다. 마찬가지로 심판의 날에도 있을 것입니다. 죄인들이 가지게 될 자신들의 죄에 대한 확신은 현재 세상에서 갖는 양심의 확신은 물론이거니와 심판의 날에 율법이 행하는 사역이 될 것입니다. 달리 말한다면, 지금 율법의 사역이 단지 법적인 측면만 있다면 장차 심판의 날에 죄인들의 양심 안에서 전적으로 자신들이 입을 완전하게 다물게 하는 것과 같은 현재 상태를 훨씬 능가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3:19).

 

모든 입들은 지금이든 혹은 장래이든지 간에, 율법에 의해서 닫혀 질 것입니다. 온 세상은 죽음에 대한 정죄와 버림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정죄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율법의 위대한 사역의 대상이 되어 그래서 정죄를 받은 것과 그들의 입은 닫혀 지게 되는 것이 그들이 회심 되어졌다는 확실한 표지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버림받는 것에 대한 경고 가운데, 정죄에 대해 전적으로 가지는 감각의 욕구(want)와 형벌을 받는 것이 마땅한 것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이 그 사람이 회심되었다는 표지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형벌로부터 구세주로서 그리스도를 그들의 영혼 전체가 참되게 소유했다는 증거가 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형벌로부터 구세주의 복음을 전적이고 진정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닌 것은 쉽게 증명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확신을 갖는 것은 그 사람들이 참된 믿음을 가졌거나 그들의 구세주로서 충분하고 참되게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는 확실한 표지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큰 확신을 가진 이후 어느 순간에 그들의 마음속에 커다란 위안과 기쁨, 신뢰를 가졌다고 해도, 그들의 위안들이 선한(good) 기초 위에 세워졌다는 확고한 증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너무나 많은 정신적인 압박(stress)이 그들의 갖는 위안들에 앞서 이루어지는 율법의 커다란 사역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경험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율법의 죄를 깨닫게 하는 역사가 믿음에 선행하여 필요하다고 볼뿐만 아니라 이에 뒤따르는 믿음과 위안들이 참되고 진실한 것이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최고의 증거로 여깁니다. 이러한 방법들에 의해서 매우 많은 사람들이 거짓된 소망 안에 속고 있고, 자신들의 믿음을 그 위에 세우는 것은 두려운 결과를 갖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경우들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은 이러한 사실을 확증해 줍니다. 양심의 큰 확신들이 너무나 평범하다고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안전하게 받아들여집니다. 그리고 보다 약한 확신들을 가지는 것은 회심을 갖지 못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율법의 역사 안에서 죄인들에게 훨씬 크게 앞서 사역할 때, 그들에게 자신들의 마음(hearts)에 대해 커다란 시야와 영적인 불의들이 가증스럽다는 마음을 주는 것인 것이 보다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변명할 여지가 없다고 확신시키고 이러한 상태는 그들의 모든 의는 하나님의 호의에 어떤 공로도 될 수 없고 그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보응(報應)을 자비와 함께 정당하게 드러낸 상태 속에 있다고 볼 수 있고 그래서 구원하는 회심의 사역이 뒤따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너무나 보편적이거나, 양심의 확신들이 보다 증진 되었을 때 구원하는 믿음과 회심은 확실하게 뒤따를 것이라는 것이 확고한 규칙이라고 말하는데 있어서 어떤 보증도 가질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회심이 이러한 결정에 대한 근거로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결국 그들 영혼은 구원하는 믿음을 결코 갖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회심의 사역이 이루어지는데 있어서 그리고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하여 마음(heart)을 크게 준비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이 회심 시 하시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들과 계획들이 무엇인지를 매우 긍정적이고 특별하게 결정하기 위하여 사려 깊게 스스로 생각한다면, 저는 여러분들이 우리들의 회심에 대한 의심들과 어려움들의 목적이 어디에 있을지를 고려해 보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이러한 견해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회심 시 죄인들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특별한 사역과 양심의 확신에서 또한 그가 회심이 허사가 되는 것에서 그 이후에 언제 참된 회심의 목적을 겪었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만약에 그가 결국은 헛된 어떤 정도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교리적인 범위를 설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등급(degree)이 얼마나 위대하게 될 것이냐? 말할 것입니다. 죄인이 지옥에 있는 버림받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고 마귀들도 가지고 있는 그러한 큰 확신을 가졌을 때, 회심에 대한 확실한 근거들과 이를 결정하는데 참된 믿음과 영원한 구원에는 어떤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도가 본문말씀에서 말한바가 정당하다면 우리가 확실하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마귀들이 가졌던 그 어떤 것도 참된 회심과는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현재 가지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장차 심판의 날 그리고 지옥에서 그들이 가장 완벽한 확신들을 가질 수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은 미래의 심판과 버리시는 것을 예견(豫見)하여 결코 버림받는 자들이 있을 수 없게 하실 것이라고 누가 말할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면 누가 하나님에게 당신은 무엇을 하시냐고 질문할 수 있겠습니까? 혹은 하나님에게 그렇게 하시는 목적들에 대한 이유를 질문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가능한 현명한 목적들이 생각되어지고 언급되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면, 저는 지금 그것에 대한 답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종종 악한 사람들의 마음(heart)속의 활동들에 의해 억제됩니다. 그 후에 성령은 회심의 사역 안에서는 훨씬 더 큰 역사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확신들은 결코 회심에 대해 좋은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최고의 칭의에 대한 법적인 확신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도 그것에 의해 전혀 억제되지 않고 하나님의 대적자나 반대자로 행하는 죄인들이 실제 지옥에 있는 버림받은 사람들이나 이 세상의 죄인들 안에서는 없는 것인데, 하나님이 회심의 사역에서 가장 큰 범위로 진전시키신 후에, 그들에게서 성령을 거두시지 않으셨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결코 멸망시키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면 신명기를 보면, 하나님은 안식의 땅의 경계선인 모압 평지에서 조차도 이스라엘 사람 중에 얼마를 죽이셨습니다.

확실한 중생의 표지가 되는 것으로 어떤 법적인 확신들의 용도가 이루어지는지, 율법의 사역 안에서 연속적인 사건들의 어떤 방법과 질서 그리고 뒤따르는 위안들이 우리의 회심에 대한 보증인 것이 성경 어디에서 말하는지 고려해 보고자 합니다. 성경은 참된 성도들의 특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를 입은 상태에 대한 증거들을 분명하게 풍성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있는 많은 증거들 중에서 참된 회심의 증거들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혹은 은혜 자체 가운데 있는 것과 은혜의 본성 그리고 그 활동들과 열매들 등과 같은 다른 표지들을 성경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증거들은 욥이 의지한 것에서 볼 수 있고 시편기자가 시편 어느 곳에서나 진정성이 있는 증거들로서 말한 것이나 특별히 시편 119편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러한 증거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병중에 의뢰했던 표지들 등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구세주께서 산상수훈 설교의 앞부분에서 말씀하셨던 참된 행복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들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언급된 내용들은 그분의 진정한 제자들 된 것에 대한 증거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까지 제자들에게 그에 마지막 대화이면서 죽음을 앞둔 말씀 안에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중보기도에도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종종 자신의 진정성과 영광의 면류관에 대한 확실한 자격의 증거들로서 말한 것들입니다. 사도바울이 그의 서신서들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주 언급한 이러한 것들은 참된 기독교의 적합한 증거들이며 의롭게 된 상태와 영광에 대한 자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성령의 열매들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522절에서 25절까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들의 적합한 증거들이며 성령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삶입니다. 이것은 사도가 말한 것처럼 다른 모든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참된 경건의 가장 본질적인 증거입니다. 또한 순결하고, 평화를 이루며 온유하며 쉽게 용납할 수 있고 풍성한 자비가 넘치는 신적인 사랑 혹은 자선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은 사도 야고보가 참된 지혜와 선한 사람의 적합한 증거로서 말하는 표지들이기도 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3:17). 이것은 사도 요한이 그의 서신서들 전반에 걸쳐서 말하는 참된 기독교의 표지들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시작에서 끝까지 모두에서 앞에서 언급한 것들과 다른 경건의 표지들을 어떤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이러한 것들을 자신들의 마음속에 분명하게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들은 비록 하나님의 성령이 어떤 방법으로 그들 영혼 속에 이러한 것들에 대한 사역을 했는지를 먼저 알지 못하거나, 때로는 서로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을지라도 그들이 참되게 회심되었다는 것이라고 결정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사역들은 어떤 측면에서는 찾아질 수 없지만 성경은 종종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들로 이러한 것들을 표현합니다.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40:13), “바람(성령)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11:5),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3:8)

 

. 사람들이 구원에 대한 진지한 열망들과 갈망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은혜에 대한 확실한 표지가 아닙니다.

마귀들 역시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이 겪는 비참함과 앞으로 닥칠 더욱 큰 비참함으로부터 구원받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러한 비참함을 생각하며 두려움으로 떨었다는 것은 마귀들도 이것으로부터 구원되기를 필연적이면서 진지한 갈망으로 가지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심판의 날에 악한 사람들이 의인들이 갖는 특권을 그들도 갈망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문이 닫혔을 때 그들은 문 앞에 다가가 소리칩니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그러므로 우리는 매우 진지하고 간절한 모든 갈망들이 경건한 마음(heart)에 대한 확실한 증거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본성에서 나오는 적합한 호흡이면서 진정한 성도들의 구별되는 특징으로서 참된 종교적 본성에서 나오는 진지한 갈망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 종종 갖는 경건에 대한 잘못된 표지들로서의 갈망들도 또한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의에 주리고 목말랐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천국에 대한 진지한 갈망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이러한 모든 것들은 자기 사랑으로부터 기인한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마귀들이 가졌던 진지한 갈망보다 더 높은 원리들(principles)로부터 나온 갈망이 아닙니다.

 

. 은혜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천상적이고 신적인 것들에 관한 외적인 영광이나 종교에 대한 외적인 소유가 무엇이든지간에 이러한 것들에 대한 거대한 이해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주변의 증거에 의해 추론되어집니다.

사람들이 외적인 감각들에 의해서 얻어진 관념들(ideas)이 그들의 마음속에 강하게 감동되었다(impressed) 해도 이러한 것들은 은혜에 대한 확실한 표지들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귀를 통해서 얻어진 관념들(ideas)로 어떤 친절한 소리, 즐거움을 주는 음악, 탁월한 현저함으로 선포된 말씀들, 그들의 상황에 적절할 수 있거나 자신들의 명상의 주제로 채택한 성경의 말씀들 등과 같은 것들입니다. 혹은 눈을 통해서 얻어진 관념들(ideas)로 보여 지는 아름다움과 영광, 찬란한 빛, 황금 거리들, 값비싼 돌로 된 문들, 찬란한 빛 가운데 천사들과 성도들에 의해 둘러싸인 매우 장엄한 보좌 등과 같은 것들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어떤 외적인 것들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겸손해진 상태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나 그의 가시 면류관, 그의 드러난 상처들, 흘러내리는 피 등과 같은 것들입니다. 혹은 놀라운 위엄을 가진 그의 영화롭게 된 상태에서 그분의 용모 가운데 태양보다 밝게 빛나는 그의 얼굴이나 그와 비슷한 것들과 같은 황홀한 아름다움과 달콤함 등과 같은 것들입니다.

지옥에 지금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들 보다 훨씬 뛰어넘는 하늘나라에 대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는 외적인 영광에 대한 관념들(ideas)을 가질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날에 나타나실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모든 외적인 영광과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날에는 현재 상태에서 성도들이나 죄인들 각자가 상상한 것보다, 물론 도덕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인식된 것보다도 수 천 배는 더 크게 감동되어질(impressed) 것입니다.

 

. 은혜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속에 많은 신적인 것들에 대해 매우 크고 영향을 주는 감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마귀들은 커대한 이해를 통한 지식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깊게 영향을 주는 많은 신적인 것들에 대한 감각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가장 강한 인상을 주었습니다.(impressed) 이러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마귀들과 버림받은 영혼들은 다른 세계에 관한 것들에 대해 거대한 중요성의 커다란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세계의 것들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보고 압니다. 그들의 경험은 그들에게 이것들을 가장 영향을 주는 방법으로 가르칩니다. 그들은 구원의 가치에 대한 위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불멸하는 영혼들에 대한 가치, 사람들의 영원한 행복에 관한 거대한 중요성의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마지막 예화는 지옥에 있는 부자가 나사로를 그의 다섯 명의 형제들에게 이러한 고통의 장소에 오지 않도록 자신의 처지를 증거 하기 위해서 보내 주기를 탄원하는 것으로 이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의심할 바 없이 끝없는 영원성에 대한 거대함, 현실의 삶의 비교되는 짧은 순간들, 그 시간에 가졌던 관심들이나 즐거움들의 허무함 등에 대한 가장 생생하고 영향을 주는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의 모든 일들 심지어는 가장 위대하고 가장 중요하게 나탄 났던 것들이 영원한 세계의 것들과 비교했을 때 오히려 경멸스러운 일들 이라는 것을 매우 효력 있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시간의 중요성과 은혜의 수단들에 대한 위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 아래 사는 즐거움이 주는 무한한 가치의 특권들에 대한 위대한 감각을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죄 안에서 행했던 것들이 전적으로 어리석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졌던 하나님의 경고들과 권면들의 빛에 대한 기회들을 놓친 것을 후회합니다. 그들은 너무나 크고 회복될 수 없는 비참함을 가져온 그들 자신의 죄에 대한 넘치는 어리석음을 비참하게 통탄하고 있습니다. 죄인들이 그들의 악한 길에 대한 무서운 결과를 비참한 경험에 의해 안다면 마침내 이렇게 말하면서 애통해 할 것입니다. “두렵건대 마지막에 이르러 네 몸, 네 육체가 쇠약할 때에 네가 한탄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찌하여 훈계를 싫어하며 내 마음이 꾸지람을 가벼이 여기고 내 선생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며 나를 가르치는 이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던고(5:11-13).

그러나 진정한 경건은 신적 일들의 중요성에 대한 위대한 감각을 갖습니다. 은혜가 없는 사람들이 지속적이고 유지하는 수단으로 이러한 감각을 계속 갖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은혜의 확실한 증거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도 영원성에 대한 중요성, 시간의 헛됨, 불멸하는 영혼들에 대한 가치 등에 대한 감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시간의 중요성과 은혜의 수단들, 죄를 따라 행한 것에 대한 어리석음 등에 대한 감각을 또한 가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것들에 대한 감각을 깊이 느끼고 이로 인해서 그들의 죄에 대해서 애통해 하거나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보다 많이 관심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비록 이것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경건한 사람들이 그것들을 갖는 것과 같은 원리들과 관점들로부터 또한 같은 수단으로부터 모든 측면에서 경건한 사람들이 소유한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2. 마귀들과 버림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놀라운 위대함에 대한 강하고 가장 영향을 주는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의 대적들에 대하여 신적인 보복을 수행하는 데서 명백하고 위대하게 드러납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9:22). 마귀들은 하나님의 위대함과 그분의 놀라운 권능에 대한 강한 감각 가운데 떨었습니다. 또한 지금 버림받은 영혼들에게도 명백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장차 주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시고 그들에게 보복하시는 날에 더욱 분명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의 현존과 그의 권능의 영광으로부터 영원한 멸망으로 처벌을 받게 될 그날에 그들은 보좌에 앉은 그리스도의 얼굴을 피하기 위해서 열심히 도망치려 할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2:10)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 재림하실 때 그러한 영광 안에서 그를 모든 눈들이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이런 측면에서 그들은 그의 두려운 권능을 볼 것입니다.) 또한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1:7)입니다. 그리스도가 천하고 추함 가운데 나타났을 때 그를 멸시하고 핍박했던 마귀들과 악한 사람들 모두가 그때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 그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두려운 권능에 대한 감각이 구원하는 은혜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악한 사람들과 마귀들도 그러한 능력을 가졌음을 우리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많은 악한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이러한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시나이 산에서 악한 군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신 것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들은 보았고 깊은 영향을 느꼈으며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장막 안에서 떨었습니다.

3. 마귀들과 버림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에 대한 어떤 종류의 확신과 감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양쪽 모두에 있고 강하고 매우 큰 영향을 줍니다.

마귀들은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에 대한 커다란 명확성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땅에 기초를 놓으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며 그래서 매우 깊이 이것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수많은 셀 수 없는 다른 위대한 증거들을 보아왔습니다. 예를 들면 대홍수, 소돔의 멸망, 이집트에서 일어난 기적들, 홍해의 기적, 여호수아의 시간에 태양이 멈추었던 것 등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 모든 무리들이 하늘로부터 지옥으로 던져지는 것 안에서,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의 명백함이 그들 위에 있다는 것을 깊게 느꼈습니다. 하나님이 어두움의 강한 속박으로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것과 그들이 느끼는 강한 고통 안에서 이러한 것이 영향을 주는 지속적인 경험을 합니다. 그들은 장차 하나님의 권능의 영광으로 처벌을 받게 될 때, 보다 더 크게 이러한 것을 느끼는 경험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 떠는 것은 장차있을 거대한 파멸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마귀들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위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어떤 윤리적인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보다 더욱 크게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과 또한 섭리의 사역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들을 세밀히 바라보는 기회와 시기를 보다 크게 가졌고 할 말을 잊었습니다. 또한 그들 자신의 가장 교활한 계략(計略)들이 하나님의 너무나 놀랍고 굉장한 방법으로 실망과 혼란으로 좌절 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지혜의 명백함에 그들 스스로가 무한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죄에 대한 무한한 증오(憎惡)와 이러한 증오로 장차 그들이 당할 두려운 결과들을 느끼는 것과 같은 가장 그들의 마음에 영향을 주는 방법 속에서 하나님의 신적인 본질의 무한한 순결함과 거룩함을 발견하고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귀들은 이미 자신들이 지금 겪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본성을 알지만 장차 더 높은 수준과 훨씬 크게 마음에 영향을 주는 방법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죄를 미워하는 본성은 이에 대항하는 것을 무한히 맹렬하게 태우는 소멸하는 불과 같은 것인데, 마귀들의 지금 상태가 하나님의 죄에 대한 본성에 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영광 안에서 의와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실현된 것에서 하나님의 거룩함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들과 악한 사람들에게 더욱 크게 마음에 영향을 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확한(exact) 공의는 심판의 날에 빛이 비쳐질 때, 그들에게 가장 선명하고 가장 강하면서 또한 가장 큰 확신과 마음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명백해 질 것입니다. 이러한 때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자비(慈悲)로 선택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기적적인 열매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에 대한 위대하고 마음에 영향을 받는 증거들을 볼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의 우편 있는 사람들에게서(구원을 받은 사람들-역자 주) 그들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 해와 같은 것이 비추어지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위에 선고된 복된 판결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들에게 깊게 마음에 영향을 줄 것입니다. 누가복음 1328,29절은 자연스럽게 이것을 보여 줍니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마귀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압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위협을 믿고 장차 그들에게 임할 심판을 바라보며 떨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진리를 의심하는 악한 사람과 하나님의 말씀을 대담하게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장차 가장 큰 확신과 마음에 영향을 갖는 방법 가운데 그들을 위협했던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그의 성도들에 대한 보상의 약속에 신실하신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귀들과 버림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영원하고 변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국 비참하게 되어 진 자신들의 상태에서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단순히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든 그 중 어떤 것이든 그것이 영향력을 주는 감각으로 있다고 해도, 이것은 그들의 마음(heart)속에 하나님의 참된 은혜를 있다는 확실한 표지가 아닙니다.

 

(반론) 여기서 몇 가지 가능한 반론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불경건한 사람들은 마귀들이 있는 환경들과 악한 사람들이 심판의 날에 있게 될 환경과는 훨씬 다른 환경들 안에 있습니다. 현재에 보이는 그러한 것들은 다른 세상의 보이지 않고 미래에 대한 현재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사악한 사람들은 영혼을 방해하고 그들을 눈멀게 하거나 어리석게 하는 대상들로 둘러싸이게 하는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세상에서 악한 사람들은 은혜 없이 그러한 것들에 대한 거대한 이해와 살아있는 감각을 가질 것이기 때문에, 지금 현재 상태에서 불경건한 사람들이 이와 같은 것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대답) 여기에 대해서 저는 이렇게 답변하고자 합니다. 현재에 살아 있는 사람들은 마귀들과 버림받은 사람들이 가졌던 것과 동일한 수준으로 언급되어진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삶에서 어떤 사람도 양심의 두려움이 그들과 같은 수준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떤 도적적인 사람이든 그가 경건하든 불경건하든 간에, 마귀들과 같은 수준의 이해를 통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어질 수 없습니다. 단지 지금 확인되어지는 것으로 심판의 날에 악한 사람들이 현재 상태에서 어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 보다 그리스도의 외적인 영광에 대해 거대하고 훨씬 큰 관념(idea)을 가질 것입니다. 그래서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은 현재의 연약한 상태 가운데 살고 있는 어떤 사람보다도, 하나님의 놀라운 위대하심과 두려운 주권에 대해 훨씬 큰 감각을 가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마귀들과 지옥에 있는 악한 사람들은 영원성의 거대함에 대한 보다 크고 마음에 더욱 크게 영향을 주는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 어떤 사람이 가진 것 보다 더 큰 다른 세상의 일들에 대한 중요성에 대한 감각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사악한 사람들 보다 더 큰 수준으로 구원에 대한 갈망 역시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마귀들이나 버림받은 사람들과 같은 종류의 것들을 가질 수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이해에 있어서 같은 종류의 빛, 같은 관점들과 정서들, 그러한 것에 대한 같은 감각, 마음(mind)과 정신(heart)안에 있는 같은 종류의 인상들(impressions) 등과 같은 것입니다. 반론은 저보다는 사도가 보다 적절하게 말한 그러한 이유들의 결론들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을 믿는 것이 그들이 영광스러운 존재에 대한 이유라고 생각하는 것을 마귀들도 그러한 것은 같이 믿는다는 것에서 반대하는 것이 결론적인 논지(論之)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이 논지는 그들은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믿기 때문이거나,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은혜를 가지고 있다는 그러한 생각을 동일하게 정확하게 반대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다른 것들도 동일하게 판단되어집니다. 제가 말한 바는 믿음에 대한 마귀들의 오성(understanding)의 활동뿐만 아니라 그러한 관점들에 동반되는 마음(heart)의 정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귀들이 떨었던 것은 마음의 정서에서 나온 효과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마귀들이 가진 것과 같은, 마음의 같은 정서와 오성에서도 같은 관점들을 갖는 이러한 두 가지 모두를 가지고 있다면 결론적으로 그것은 은혜에 대한 표지가 아닙니다.

 

특별한 정도(程道, degree)에는 앞에서 언급한 은혜의 표지들로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은혜 없이도 이 세상에서 사람들 안에 옮겨질 수도 있기에, 사람들의 상태를 결정하는 확고한 규칙으로 이것을 사용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가 길잡이로 삼을 어떤 규칙을 어디서 가져야 하는 알지 못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그분의 섭리, 혹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행하시는 일반적인 영향력들에 의해 이 세상에서 악한 사람들 안에서 불러일으키실 (은혜의 표지들로 보이는 것들과 같을 정도의) 엄밀한 정도(degree)(참된 은혜의 표지들과 구별하기 위해) 교정(敎政)하기 위한 규칙을 어디서 가져야 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여기서 현재 악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은혜의 표지들로 여겨질 수 있는) 것들은 다른 세계(지옥)에 있는 악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영혼의 기능들(faculties)과 원리들(principles)과 동일하며 여기로부터 나오는 관점들과 정서들을 포함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증거는 악한 사람들도 종종 실제로 어떤 정도(degree)나 혹은 더 크거나 작은 어떤 것들을 갖는 대상이 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반을 둔 은혜에 대한 확고한 증거들은 다른 종류입니다. 그것들은 전적으로 거룩하며 영적인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육신적이고 오염된 마음(heart)이 받아들이거나 경험할 수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저는 또한 여기서 성경과 (거듭난) 이성이 참된 은혜의 표지들로 말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 매우 많은 실례(實例)들 안에 있는 관찰과 경험을 추가하려고 합니다.

 

이를 위한 두 번째 용도는 자기 검증(self-examination)입니다.

관찰 되어진 모든 것들 그 자체들을, 그러한 것들이 지금까지 언급한 것 이상으로 구원하는 은혜의 보다 나은 증거들을 가지는지 여부를 떠나, 검증하고 조사하는데 적용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본문말씀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마귀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은혜의 확실한 표지가 아닌 것을 명백하게 표현하는데 얼마나 확고한지를 봅니다. 우리는 지금 마귀들과 버림받은 사람들이 현재나 장래에서 참된 은혜의 표지들과 얼마나 다른지를 몇 가지 실례(實例)들로 관찰해 왔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실례(實例)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경험, 신적인 것들에 대한 지식, 진리에 대한 믿음, 양심의 각성과 두려움들, 정죄에 대한 확신과 그들의 영원한 두려운 버림받음 속에서의 하나님의 공의, 그들의 구원에 대한 갈망들, 그리스도의 외적인 영광과 천상의 것들을 보는 그들의 시야(sight), 종교적인 것들의 커다란 중요성 대한 그들의 감각, 다른 세계, 하나님의 놀라운 위대함과 두려운 주권에 대한 그들의 감각,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 등이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심각한 자기 검증을 하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은혜의 상태에 대한 증거로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간에 그것은 마귀들이 가지고 있는 것 이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5:20). 그래서 그의 사도 야고보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은 제가 지금까지 언급한바와 같이, “여러분이 자신들의 영혼 속에서 경험하는 것이 마귀들의 경험들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사실상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모든 것들 속에서이지만 마귀들이 갖지 못한 사랑과 기쁨 같은 것과 같은 다른 어떤 것들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이 마귀들과 같은 경험들 속에서 다른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아직 마귀들의 경험을 뛰어 넘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답변을 드립니다. 비록 경험이 다를지라도 그것은 어떤 다른 원리들(principles)을 가진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마귀들이 가진 동일한 원리들로부터 단지 다른 환경들에서 경험되어진 것뿐입니다. 그래서 마귀들과 버림받은 사람들 안에서 앞에서 언급한 것들을 일어나게 하는 것으로부터 온 원리들은 자연적 오성과 자기 사랑의 두 가지 면에 해당됩니다. 자연적 오성과 자기 사랑의 이들 원리들로부터 그들 자신의 성향들과 마음의 행동들이 활동 되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들의 심판자로 경험하는 것 역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양심이며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그것으로부터 온 양심의 확신들을 가졌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종교적인 것들의 중요성에 대한 그러한 감각을 가지는 것과, 영원한 세계, 구원에 대한 갈망들 등과 같은 것도 이러한 원리들로부터 발생한 것입니다. 그들이 너무나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이나 신적 본성에 대한 모든 속성들과 매우 강하게 그들의 마음에 영향을 준 것 등에 크게 감지(感知)되는 것은 이들 두 가지 원리들의 결합된 활동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또한 으로 연결된 것, 악인들이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와 그의 성도들의 외적 영광에 대해 매우 큰 이해와 마음에 매우 커다란 감명을 받게 되는 것은 그들의 외적인 감각이 이러한 원리들과 결합되어 이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당신이 사랑이나 감사, 기쁨과 같은 것들을 마귀들이나 버림받은 사람들이 갖지 못한 것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이들 두 가지 원리들과는 다른 당신의 마음속에 어떤 다른 원리들로부터 아마 일어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단지 다른 환경들 안에서 경험되어진 이러한 원리들로부터 온 것뿐입니다. 예를 들면 당신이 하나님의 억제하는 은혜의 대상이 된 것과 소망이 있다는 환경 가운데 가진 것입니다. 마귀들의 자연적인 이해와 자기 사랑은, 그들이 만약에 같은 환경에 있다면, 동일한 방법으로 아마 마음에 영향을 줄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것의 첫 번째 근원이 그리스도가 특별하게 당신을 위해서 죽었다든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과 같은 생각 속에서 직접적으로 깨달은(suppourted) 신적인 증거나 어떤 다른 깨달은 증거 이상을 아무것도 갖지 않았다면, 그것은 자기사랑 이상의 더 높은 원리들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귀들의 마음(heart)을 지배했던 원리이기도 합니다. 자기 사랑은 은혜가 없이도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사랑하는 것들을 사랑하게 합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6:23).

 

마귀들이 만약 어떤 수단에 의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셨고 그들의 친구가 되셨고 그래서 지금 장래를 생각하며 떠는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았다는 신뢰할 수 있는 persuasion을 가질 수 있다면, 그들의 마음들(hearts)이 커다란 기쁨으로 채워지지 않겠습니까? 만약 마귀들이 당신이 들었던 것 같이, 그들의 환경들이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에 해당하는) 악함이 억제되는 것이 전적으로 포기되고 배제(排除)된 존재이고, 소망이 없고, 하나님을 단지 그들의 적이 될 것이고 자비 없이 하나님의 진노를 겪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들이 가지게 되는 것이 (죄인들의 은혜 없이도 가질 수 있는) 은혜와 경건한 경험에 대한 모방 안에서 (죄인들이 가지는 것과 비교할 때), 얼마나 크게 다를 지를 우리는 합리적으로 생각(suppose)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한다면) 마귀들이 자비를 받고 소망이 있다는 환경 가운데에서 그리고 (성령이 하시는) 그들의 부패들을 억제하는 일반적인 은혜의 대상이 되어 (자신들의 구원에 대해) 선명한 관점들과 강한 확신으로 (참된 성도들이 것과 ) 동일한 정도(degree)의 지식을 가진다면, 그들의 이성의 자연적 원리들(principles)과 양심을 흥분시키고 assisting하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일들 혹은 그와 비슷한 일들이 이 세상에서 죄인들 마음속에도 (은혜를 갖지 않았으면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신의 상상이나 사고(思考) 속에서 강한 어떤 인상(impression)으로부터 커다란 공포심을 가진 후에 갑자기 확신이 마음속에 거하게 됩니다. 이러한 확신은 위대한 하나님이 지금 그의 친구이고 아버지로서 그가 두려워하는 모든 비참함으로부터 영원한 행복을 약속한 것이 그에게 드러났다는(계시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것들이 의심할 바 없이 매우 크게 기쁨의 황홀경을 높이게 하며, 실제로는 죄인들이 그들을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원리인 자연적인 감사에서 나오는 활동을 일어나게 한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또한 이것은 강한 활동 안에서 은혜들일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커다란 모방을 갖는 경우에 해당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종류의 정서들에 속고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특별히 사람들이 마귀들이 유혹(delusion)에 앞서 이러한 것을 가지도록 돕는 것을 가졌을 때, 그의 커다란 교활함은 모든 과거의 시대를 통해서 인류를 속이는데 최고의 수준으로 활동되어 왔습니다.

 

[질문]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귀들의 마음들(minds)과 정신들(hearts) 속에 있는 것보다 더 높은 원리들(principles)이 아닌 것으로부터 나온 매우 많은 것들을 경험한다면, 하나님의 영의 구원하는 확실한 표지가 되는 것으로 정당하게 볼 수 있는 내 마음속에 발견해야만 하는 보다 높은 본성에 속하는 정서들과 활동들은 무엇입니까?”

[대답] 저는 은혜의 좋은(good) 증거들인 이러한 정서들과 활동들은 마귀들이 가졌던 모든 것들과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이러한 원리들로부터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다릅니다. 구체적으로 참된 은혜의 표지들이 되는 모든 것들은 그들의 기반(foundation)과 성향(tendency) 두 가지 측면에서 전적으로 다릅니다.

1. 그것들은 그들의 기반에서 혹은 다른 모든 나머지 것들의 기반인 그 기반 속에 있는 것들로 다릅니다. 예를 들면 최고의 거룩한 아름다움(beauty)의 감각에 대한 이해와 그리고 신적인 것들의 사랑스러움(comeliness)과 같은 것이며, 이러한 것들은 그들 자신들 속에 있거나 혹은 그들 자신의 본성 안에 있습니다.

지옥에 있는 버림받은 사람들과 마귀들은 이러한 것을 영원히 전혀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 전에 마귀들이 그들의 고결함(integrity)을 유지하는 동안 한때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했을 때 이것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마귀들이 신적존재(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감각을 소유하고 있지만 무엇을 상실했는지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마귀에게 상실된 이러한 종류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누구도 생각이나 깨달음으로 전혀 가질 수 없습니다. 마귀는 신적 본성에 속하는 단 하나의 속성도 없으면서도 강하고 아주 마음에 영향을 주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을 지금까지 앞에서 언급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마귀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풍성하게 가진 것은 분명하고 부인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신적 본성의 최고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완전히 눈이 멀었습니다. 마귀는 색깔을 전혀 볼 수 없는 완전히 시력을 상실한 상태로 태어난 사람보다 낫게 신적 본성의 최고의 아름다움의 어떤 것도 보지 못합니다. 그가 가진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한 장엄한 광경은 그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에 대한 관념(idea)과 강한 감각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름다움(beauty)과 사랑스러움(comeliness)에 대한 관념(idea)은 전혀 없습니다. 마귀는 너무나 많은 하나님의 권능의 사역들, 지혜, 거룩함, 공의, 진리 그리고 인간에 대한 놀라운 은혜의 사역들을 수천 년 동안 지켜보았습니다. 그는 가장 큰 주의를 기울이며 이러한 것들을 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 가장 최소한의 수준에 해당하는 어떠한 신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귀들이 가장 큰 주의를 기울려 마음속에서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에 대하여 강력한 능력들을 계속적으로 경험한다거나, 또는 이러한 것들을 자신의 모든 가능한 관점들로 가질 수 있고 모든 질서와 적절한 배열 안에서 이러한 것들을 가질지라도, 그러나 그들은 결코 신적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종류에는 신적인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어떤 유사점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가진 이런 종류의 지식들은 보다 더 하나님을 미워하게 합니다. 신적인 본성에 대한 아름다움은 참된 은혜를 가진 마음속에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구성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거룩함, 혹은 도덕적 탁월성 등은 이러한 아름다움으로부터 가장 확대되어 그들의 시야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귀에게는 증오에 찬 존재로 나타나신 것은 매우 중요한 평가가 됩니다. 마귀들은 하나님 안에서 거룩함을 보면 볼수록,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을 더욱 증오합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보는 시야가 크면 클수록, 승천하신 그분에 대한 증오는 더욱 커집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증오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더욱 미워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보는 하나님의 다른 속성들도 크면 클수록, 하나님을 더욱 미워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다른 속성들이 무엇이든지간에 거룩한 존재(하나님) 자체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한히 능력 있고, 무한히 지혜롭기 때문에 그들은 이러한 거룩한 존재를 더욱 미워합니다. 만약 마귀들이 자신들이 조금 더 무능하고 지혜가 부족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보았다면 훨씬 더 크게 하나님을 미워할 것입니다.

심판의 날에, 악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나머지 모든 것들을 보게 될 것이지만 그분의 아름다움과 온후하심(amiableness)은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생각되어질 수 있는 어느 하나의 이러한 그리스도의 인격의 속성 혹은 특성도 없습니다. 심판의 날에 가장 빛 속에서 그들 앞에 펼쳐질 것은 단지 앞에서 언급한 것들뿐입니다. 그들은 그분의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 또한 권능과 위대한 영광 안에서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시는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을 훨씬 뛰어 넘는 그리스도의 외적인 영광의 광경을 볼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의 모든 속성들과 완전함에 대하여 가장 강하고 가장 크게 확신하는 증거들을 가질 것입니다. 마귀들은 자신들에게 무한하게 마음에 영향을 주는 것과 같은 그리스도의 위대한 주권에 대한 감각을 가질 것입니다. 마귀들은 매우 분명하게 그리스도가 하나님(the Lord)이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귀들은 그리스도의 본성과 사역들이 가장 강한 광경으로 나타나날 것이기에, 그가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하시는지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온후하심은 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의 모든 것 중 모든 것이면서 이러한 것이 없다면 다른 모든 특성들은 아무 것도 아니며 오히려 아무 것도 아닌 것보다 더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근본적인 감각이나 시야에서 마귀들이나 버림받은 영혼들의 경험과 하나님의 영의 구원하는 은혜 사이와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경험 안에서 다른 모든 것들과 구별되는 기반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한 믿음의 기반입니다. 이것이 마음(mind)에 신적인 것들의 진리에 대한 구원하는 믿음을 줍니다. 이것은 복음의 탁월성에 대한 시야이며, 펼쳐진 교리의 내용들에 대한 신적인 온후(溫厚)함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며 마음속에 있는 구원에 대한 확신들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신적인 것이며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고후 4:3-4은 이러한 것을 분명하게 증거 합니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이어지는 6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여기서 사도의 말과 같이 복음에 대한 구원하는 믿음이 복음 속에 펼쳐진 것들에서 신적인 영광과 아름다운 시야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은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이러한 시야에 의해, 참되게 회심한 영혼은 그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능력을 확고하게 보게 됩니다. 그의 눈이 열려져 신적인 최상의 아름다움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스러움을 보는 사람은 지옥에 가기에 마땅한 악함에 대한 정죄와 무한하게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에 계신 중보자로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확신되어집니다. 이것은 신앙 책들이나 설교자들에의 논지(論之)들에 의해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을 훨씬 능가하는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탁월한 것입니다.

그가 한번 그리스도의 신적인 사랑스러움을 보았을 때, 수치스러운 죄인이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받아들여진 가치가 더 이상 놀랍다고 생각되어지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피가 가장 악한 죄들을 위한 보상으로 받아들여진 것에 대한 가치로서, 하나님에 의해 얼마나 고귀하게 여겨지는지를 인식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의 영혼은 이제 적합하게 그리스도의 고귀함을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와 순종, 그리고 중재에 부여하신 가치와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참된 근거와 이유를 적합하게 보고 이해합니다. 이것은 심령이 가난한 정죄 받은 영혼에 만족과 안식을 줍니다. 이러한 것은 가장 고상된 그리스도의 능력과 구원의 방식에 대한 적합성 등에 대한 매우 훌륭하고 섬세하게 잘 구성된 설교들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자연인이 믿음과 신뢰의 적합한 기반을 자신의 눈으로 보게 될 때, 그는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6:40). 이와 같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을 통해 사람들에게 명백하게 하셨을 때, 그때 그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이 모든 것들이 자신들의 것인 것을 믿습니다. 또한 요 17:8 말씀인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같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리스도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의지할 것입니다”(9:10).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믿음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 안에 계시되었습니다(1:15-16).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hearts)을 끌며, 의지를 굽히는 것이 그리스도의 신적 아름다움에 대한 시야(sight)입니다. 하나님의 속성들 중에 있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시야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압도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의 하나님에 대한 적의(敵意)와 대항은 충분한 능력으로 남아있고 의지도 완고하게 남아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도덕적이고 영적 영광의 섬광(閃光, glimpse)과 예수 그리스도의 최고의 온후(溫厚)하심이 마음(heart)속에 비쳐지는 것은 이러한 모든 대항을 소멸하고 극복합니다. 전지전능한 이 능력으로 그의 영혼이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됩니다. 이제 이해할 뿐만 아니라 의지와 영혼 전체가 구세주를 영접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은 참되게 회심한 영혼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하는 믿음의 첫 번째 내적 기반으로,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그를 사랑한다거나 그를 위해 특별히 죽었다든지 또는 그의 구세주이기에, 신뢰와 기쁨을 갖고 있고 그리스도가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이러한 직접적인 내적이나 외적 증거가 아닙니다. 이러한 믿음과 회심에 의해 (명백하게 헛되고 거짓된 것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미혹을 받아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비친 하나님의 영광의 시야는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최고의 사랑을 하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사랑의 적합한 기반의 시야입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최고의 아름다움과 같은 것으로 이러한 근거 위에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마귀들의 마음 안에 있는 단순히 자기사랑의 원리로부터 나온 다른 모든 것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참된 사랑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영혼 안에서 참된 영적이고 거룩한 기쁨을 낳습니다. 이 기쁨은 실제로는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적인 일들에 대한 아름다움에 대한 시야는 이들에 대한 영혼의 참된 갈망들과 욕망들을 불러일으킵니다. 이것은 마귀들의 갈망들이나 본성적인 자유로운 욕망들과는 다릅니다. 이것은 새로 태어난 간난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갈망하듯이 새로운 본성이 가지는 목마름과 식욕(食慾)에서 나오는 갈망들입니다. 마치 굶주린 사람이 그가 생각하는 어떤 기쁨을 주는 음식을 갈망하는 것이나, 목마른 사슴이 시원하고 깨끗한 시냇물을 맛본 후 숨을 헐떡이는 것과 같습니다.

신적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은 참된 회심 가운데 영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변화의 첫 번째 일입니다. 또한 이것은 모든 다른 변화들의 기반입니다. 고후 3:18의 사도의 말에 의해 이것이 증거 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2. 마음(mind)속의 참된 영광스러운 정서들과 경험들은 그 성향(tendency)에서 마귀들의 마음(heart)속에서 일어난 것보다 더 높은 원리들로부터 일어난 것이 없는 모조품과 같은 거짓된 것들과 다릅니다. 여기서 참된 성향은 두 가지 측면을 갖습니다.

(1) 이들은 특별히 마귀의 죄와 교만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성향과 영향에 속합니다. 교만은 특별한 태도(manner)로서 마귀의 죄입니다. 딤전 3:6은 이를 분명하게 증거 합니다.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거짓되고 미혹된 경험들은 때로는 매우 큰 겸손으로 위장되기도 하지만 항상 교만으로 치우치게 합니다. 영적 교만은 거짓 깨달음과 정서들에 미혹된 것으로, 위선자들의 일반적인 특성이고 그들이 갖는 지배적인 기질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영적 교만은 그리스도인의 기질에 속한 두 가지 것들과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성향입니다. 이러한 면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6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다른 곳인 빌립보서 2:3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거짓 경험은 스스로를 속이고 스스로 마음에 감동을 줍니다. 그래서 거짓 겸손을 가진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얼마나 스스로 낮추는지를생각하며 많이 감동됩니다. 자기 자신이 가진 사랑의 위대함을 생각할 때, 거짓 사랑을 가진 사람은 마음이 감동됩니다. 거짓 경험이 갖는 바로 그 자신의 음식과 성숙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며 자기 자신에 많은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신의 호흡과 생명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는 여러 가지 방법들입니다. 반면에 참된 영광스러운 관점들과 정서들은 완전히 반대되는 성향 속에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자기기만을 키우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의, 경험, 특권에 대한 인식을 높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겸손들에 대한 높은 자존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가식(假飾)이 무엇이든지간에 이러한 가식이나 자기높임이 없는 성향을 가집니다. 그들의 참된 회심의 기반인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과 최고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은 교만을 죽이고 참되게 영혼을 겸손하게 합니다. 이것은 교만의 가장 바깥쪽 가지들의 일부를 잘라내는 것뿐만 아니라 교만의 그 뿌리 자체를 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heart)의 본성과 성향 그 자체를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빛은 그것만이, 참되게 영혼에게 그 자신의 결함(缺陷)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유효하게 스스로를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성향을 갖게 합니다.

(2) 이러한 영광스러운 경험들과 정서들은 그 성향에서 사탄의 의도를 파괴하는 것에서 다른 것과는 다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 사람 자신 안에 있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영혼이 모든 죄와 거짓된 방법들을 미워하는 것을 불러일으키고, 마음(heart)과 삶에서 전반적인 거룩함을 갖게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그의 삶의 직무(職務)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에게 선행을 고양시키고자 합니다. 반면에 거짓된 깨달음들과 정서들은 이러한 효과를 갖지 않습니다. 실제로 종교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매우 큰 열정을 가지고 많은 일들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열정이 아니며, 선행들에 대해 열심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종교는 하나님을 찾거나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그들 자신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삶의 어떤 변화가 있다고 해도,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위에서 모든 악한 길로부터 떠나는 변함없는 변화가 아닙니다. 단지 부패된 마음의 샘이 어떤 통로에서 다른 통로로 바뀐 전환일 뿐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사도 야고보는 마귀들의 믿음과 참된 믿음을 구별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마귀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2:19-20). 또한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참된 공동체를 다음과 같이 구별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6-7). 이어서 그는 참된 영적 지식을 이렇게 구별하였습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3-4). 사도는 그 결과인 참된 사랑을 다음과 같이 구별하였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요일 3:18-19).

2. 참된 영광스러운 경험들은 이 세상에서 사탄의 의도를 파괴하는 성향을 가집니다.

하나님의 영의 사역들의 모조(模造)로 구성된 거짓된 거짓 종교는, 고상한 체 하면서 커다란 내적인 종교적 경험을 가지는 것 안에서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지만 또한 비록 현재에는 이것이 사람들을 많이 놀라게 하거나, 일부 죄인들에게 경고나 각성을 주는 기회가 될지라도 살아있는 종교의 근원을 크게 약화시키며 큰 상처를 줍니다. 또한 죄인들의 마음을 절망적으로 완고하게 하고 경건의 능력에 대항하고자 편견이 세상에 넘치게 충만케 하려는 사탄의 의도를 강화시켜 줍니다. 그리고 불신앙과 음탕한 원리들과 행위들을 촉진시키고 이 세상에서 사탄의 왕국을 강화시키고 세우게 합니다. 이것은 공개적인 악한 신성모독이나 무신론에 대한 주장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아마 다른 어떤 모든 것보다 더욱 나쁜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체의 진정한 아름다움 안에 있는 참된 종교와는 전혀 다릅니다. 만약 거짓종교가 커다란 능력을 발휘한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참된 종교의 다른 많은 적들과 사탄을 열광에 빠트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자신들의 친구들에게 큰 이점(利點)을 주고, 그들의 동기(動機)를 넘치도록 강화시켜주고, 그들의 적들을 혼란에 빠트리거나 시키거나 자신들에게 확신이 있는 것같이 합니다. 참된 종교는 성도들의 영혼 속에 있는 신적인 빛입니다. 이것은 사람들 앞에서 대화하는 가운데 돋보여지고, 또한 다른 것들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믿음을 확신시키기 위해서나, 반박하는 입을 막기 위해서나, 사람들의 양심을 각성시키기 위한 어떤 수단들도 없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천성적으로 경건의 능력을 미워하지만 그것의 열매들을 보았을 때, 경건이 가지는 호의(好意) 안에서 자신들의 양심 속에서 증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14:17-18). 참된 종교가 승리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큰 박해를 당할지라도 언제나 참된 종교 자체의 명예에 이르게 하는데 있습니다. 이 세상 관점에서 참된 종교가 나타나고 본이 되면 될수록 더욱 크게 자체의 명예나 그 근원의 명예가 될 것이라는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1:11).

 

세 번째는 마귀들이나 불경한 사람들이 결코 가지고 있거나 가질 수 없는 이러한 구별되는 특성들과 정서들을 찾으라는 권면입니다.

이러한 것들로 구성된 내적 미덕과 종교가 얼마나 탁월합니까! 여기에는 성도들과 하늘나라에 있는 천사들의 가장 탁월한 경험들로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낮아지신 상태이든지 높아지신 상태이든지간에,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최고의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과 탁월함의 어떤 것에 대한 교제라고 말합니다. 신적 본성에의 참여(벧후 1:4), 그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것(12:10),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참여하는 것(1:16)이라고 말합니다. 이 결과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성도들은 충만해집니다(3:18-19). 또한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 모두와 교제를 가집니다(요일 1:3). 그들이 자신들의 행복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신적 미덕으로 하나님과 성도들은 서로 안에서 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이러한 특성은 이것을 소유한 사람을 틀림없이 실제로 탁월하고 행복하게 하고, 의심할 바 없이 피조물 중 가장 고상한 위대함과 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오직 그분의 특별한 호의들로 주신 하나님의 특이한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그분이 개나 돼지로 여기시는 사람들에게는 은이나 금이나 다이아몬드, 세상의 왕관들이나 왕국들을 던져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복입니다. 이것은 육체나 피가 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이것을 수여해 주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이 선택하신 자들을 얻기 위하여 죽으신 것에서 나오는 특별한 유익입니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영원한 사랑의 가장 탁월한 표지이며, 그의 위대한 사역들 중 최고의 열매이며, 그의 피의 가장 고귀한 대가입니다.

이로 인해 다른 모든 것들에 우선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것들보다 우선하여 성도들이 세상에서 빛나게 되고, 인류 중에 축복 받은 자들로 자신들의 위안을 갖게 합니다. 여기로부터 모든 이해를 넘어서는 평화말할 수 없고 영광이 가득 찬 기쁨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이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에 대한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될 것입니다. 이것을 소유한 영혼이 가라앉거나 멸망당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영원한 씨앗으로 시작된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소유한 사람들은 결코 죽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영광의 빛으로 이끌고 마음(heart)속에 있는 떠오른 낮의 별(day-star)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입니다(4:14). 이것은 하늘나라에서 온 것이며, 천상적인 본성이며, 하늘나라로 이끕니다. 그리고 이것을 소유한 사람들은 비록 지금은 황무지 안에서 방황하거나 폭풍우가 내리는 계절 속에서 이리저리 옮겨짐을 당하지만 마침내 하늘나라에 확실하게 도착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이러한 천상적인 불꽃은 커질 것이며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의 영혼들은 밝고 정결한 불꽃 안에서 변화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아버지의 왕국에서 해와 같이 밝게 빛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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